오늘도 심방을 다녀보니 여기저기 넘어진 이들이 있다. 미끄러운 빙판길의 겨울도 아닌데, 마음의 겨울을 보내는 이들이 이 작렬하는 여름에도 있더라.
그래서 목회자는 오늘도 위로와 격려와 기도로 그들을 찾아 일으킨다. 물론 스스로 훌훌 털고 일어나는 이도 있어 감사는 하다만, 우리 삶에 이런 넘어질 일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목회도 그렇다. 사실 세상에 단 한 번도 넘어져보지 않은 목회자가 어디 있으랴. 넘어졌었지만 다시 일어났으니 오늘을 살지. 그러니 혹 이런저런 이유로 넘어진 이가 계시다면 다시 일어서시기를 바란다. 모름지기 목회자는 넘어질 땐 누구에 의해 넘어져도, 일어날 땐 스스로일 수밖에 없음을 일찍부터 깨달아 온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가?
첫째, 은혜를 다시 기억하고 회복할 때이다(단 10:19). 그렇게 믿음 좋았던 다니엘도 한 때는 힘도 없어지고 호흡마저 남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천사가 들려준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란 그 말 한마디에 다시 일어섰다. 그만큼 은혜 채우는 일은 중요하다.
어쩌면 목회자의 넘어짐도 은혜가 마르고, 은혜를 잊어서일 수 있다. 이럴 땐 은혜부터 회복하고 채우는 게 급선무다. 더더욱 목회자는 은혜 아니면 못 사니까. 그러니 그 수많은 예배들 가운데 남들만 은혜 받게 하지 말고, 목회자부터 은혜 받자. 은혜 아니면 절대로 서있지 못한다.
둘째, 누군가로부터 충전과 어루만짐을 입을 때이다(왕상 19:8). 엘리야가 그런 경우인데, 정말 누구라도 그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면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위기는 엘리야의 불신앙 때문에도 찾아오긴 했지만, 일단 천사는 그를 어루만졌다. 아무런 추궁없이 그냥 곁에 있어주었고, 필요한 것만 공급했다. 그랬더니 엘리야는 기적처럼 다시 일어났다.
이렇게 어떤 경우에는 백 마디 충고보다 한 번의 어루만짐이 더 좋을 때가 있다.
셋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신뢰할 때이다(행 3:6~8).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걸인도 그래서 다시 일어났다.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값진 예수의 이름을 그가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주의 이름만 순전히 붙잡아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넷째, 의롭게 살았을 때이다(잠 24:16).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넘어지지만,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했다. 그러니 아무리 어려워도 편법은 쓰지 말아라. 어려울수록 더 정도(正道)를 걸어라. 그래야 일어설 기회가 온다.
다섯째, 사명이 있을 때이다(사 60:1). 나도 인생을 살아보니 해야 할 일이 없으면 계속 마음이 가라앉기만 하더라. 그런데 할 일이 있을 때는 그 힘으로라도 다시 일어나더라.
고등학교 3학년 말, 대학 낙방 소식을 들은 그날, 실제로 부산대교 위에 올라 죽으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하필 그날 밤 약속해둔 일 하나(교회 행사에 특송하기로 한 일), 그게 생각이 나서 다시 힘을 내었다. 그 행사 하나가 뭐라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일을 하고나니 다시 힘이 나더라. 주님이 날 다시 만져주시더라.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렇다. 사명을 붙들면 그 사명 때문에라도 쓰러진 나를 일으켜주신다.
여섯째, 말씀을 받을 때이다(욘 3:3). 요나가 왜 넘어졌는가? 말씀을 거부해서이다. 어떻게 일어났는가? 말씀을 붙잡아서이다. 그러니 다시 일어나고 싶으면 더 말씀에 귀 기울여라. 내가 말씀을 붙들어야 말씀도 날 붙들어주신다.
일곱째, 부활의 주님을 믿을 때이다(고전15:50~57). 예수님의 죽음으로 뿔뿔이 흩어져 주저앉았던 제자들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다시 일어났다. 믿음은 더 견고해졌고, 주의 일에도 더 힘쓰는 자들이 되었다. 이렇듯 주님의 부활이 내게도 실재(實在)가 됐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다시 일어선다. 그러니 목회자들이여, 우리도 이로써 다시 일어나보자.
김종훈 목사 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