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자신의 신학을 상징한다며 만든 문장(紋章) ‘루터의 장미’(Luther Rose) 둘레에 새겨 넣은 글귀 ‘그가 사신다’(Vivit)처럼, 오직 믿음으로 인한 오직 예수가 그 안에 살기 시작하면서 그의 내면세계 ‘아드 폰테스(Ad Fontes)’, 즉 ‘신앙의 본질’이 숨쉬기 시작했다. 그것이 교회와 세상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출발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인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4오직’ 또는 ‘4솔라’라 할 수 있는 ‘오직 믿음으로’(솔라 피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솔라 그라티아), ‘오직 성경’(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솔라 글로리아)으로 거대한 종교권력을 향해 외침으로 사데교회 같은 거기에 생명의 주 예수를 믿음으로만이 의로워짐이 선포됐다. 그의 ‘오직’, 즉 ‘솔라’는 종교, 정치, 사회, 문화예술, 노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를 가져왔으며 더 나가 독일과 유럽 그리고 신대륙에까지 변화를 일으켰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국 본질, 즉 성경으로의 변화였다. 지금 한국교계는 종교개혁 500주년 특별행사들을 준비하며 각종 학술, 퍼포먼스 등 이벤트들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행사 준비
영국의 괴기 소설가 B. 스토커는 걸출한 뱀파이어, 드라큘라백작을 내세워 피의 효능을 왜곡시켰다. 인간의 피가 공급되기만 하면 드라큘라는 계속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거 아닌가. 드라큘라가 인간의 피를 빨아 먹고 영생(?)한다는 건 그래도 봐줄 만 하다. 이건 어떤가?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인간의 피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하는 건 주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 그분의 죽음이다.” 말이 되는가? 말이 되지 않는데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무서운 교리를 주장하는 자가 존 맥아더(John MacArthur)이다, 존 맥아더는 캘리포니아주 쎈베리에 있는 은혜교회(Grace Community Church) 담임목사요 마스터신학교 학장이다. 신학서적과 신앙서적도 많이 집필했다. 특별히 한국 목회자들에게 복음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맥아더 목사의 피의 교리는 심각한 성경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이단교리이다. 1976년 맥아더 목사가 하나의 글을 출판했다. 그 글은 그리스도의 피에 관한 자신의 설교문에 대해 질문했던 자기 교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특별히 출판된 그 글은 맨 위에 “그의 피 흘림이 아니라 그의 죽으심”이
산바람 강바람이 불어온다. 계속되는 폭염 속에 전국의 인파는 바다, 강 그리고 산과 계곡이 많이 있는 강원도의 여름축제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동해안 해변 피서객이 1000만 명을 넘고 있다는 뉴스도 눈에 띈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D-180을 앞두고 펼쳐지는 여름휴가 시즌을 맞아 화천 문화마을에서 열린 여름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 이벤트 가운데 하나인 ‘토마토 속 황금반지를 찾아라’에 참가한 관광객과 시민들이 토마토 세례를 맞으면서 즐기고 있는 신문의 사진들은 여름만이 줄 수 있는 볼거리이다. 계속되는 폭염에 전국의 인파들이 바다, 강, 산으로 피서를 즐기는 것은 우리들의 생활에 ‘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강원도의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들도 모두 평창 동계올림픽에 온 정성을 다하고 있는 모양새다. 모두 한마음으로 온 국민을 강원도 평창으로 초청하고 있다. “당신이 평창입니다.” 얼마나 절절한 외침인가? 그에 맞춰서 홍천강 별빛 음악축제, 영월 동강 뗏목 축제, 철원 화강 다슬기 축제, 오색 달빛 강릉야행, 화천 쪽배 축제, 섬강 축제, 평창 더위사냥 축제, 망상 야해 페스티벌, 경포 서머 페스티벌 등 다양한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영월 동강
미국 마케팅컨설팅업체 앤더슨 애널리스틱스가 미국 대학생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결과 삼성전자를 일본 기업이라고 답한 대학생은 무려 58%였다. LG전자 역시 응답자의 42%가 미국 기업이라고 대답했고, 26%는 일본기업이라고 대답했다. 한국 기업이라는 응답은 겨우 9%에 그쳤다. 왜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한국 정부가 국가 브랜드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미국 대학생들이 한국을 모를 수도 있다. 아니면 한국 기업들이 한국 회사라고 하면 물건이 안 팔릴까봐 일부러 일본기업으로 착각하도록 마케팅을 펼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혹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사실은 미국 대학생이나 소비자들에게 브랜드의 국적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한다. 과거 수입품은 대부분 일본과 독일 제품이었기 때문에 브랜드 국적이 어디인지 관심도 없고 모든 브랜드가 일본이나 독일에서 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의식이 한국 기업이 미국 시장을 개척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기업 브랜드에서 국가라는 요소는 점차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브랜드에서 교회에도 새로운 흐름이 요구되고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교
여름의 산들바람이 부는 날, 강줄기를 따라 걷다보면 어느덧 메밀밭에 하이얀 꽃이 피어서 시민과 관광객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누군가 살고 있는 옛집을 고쳐 만든 커피집에서 목마름을 축이고 다시 걷던 길을 되돌아서 푸른 버드나무숲을 이룬 강가를 향해 다음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잃어진 침묵을 생각하며 스바냐 3장17절의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를 묵상해본다. 메밀밭 샛길을 걸으면서 며칠 전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옛 친구의 이야기 속에 인생길을 가는동안 꼭 피해야할 본인의 삶을 전해줬다. 그것은 누구와도 특히 사모로 교인들과 싸워서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해 줬다. 그런데 그 친구의 남편 되는 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기를 “절대 침묵자”라는 점이다. 요즈음 많은 뉴스의 홍수 속에서 ‘말말말’로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문화 예술의 생활화를 통해 삶과 문화가 일상에서 함께 이뤄가는 반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혼미시키는 ‘사탄의 키워드’도 진실인양 둔갑시켜 각종 뉴스 속에 가슴이 섬뜩하다. 세상이 온통 폭염 속에 논바닥이 갈라지고 농작물이 타들어갈 때 “아버지 하나님 은혜의 단비를 주옵소서”라고 교회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각 부처의 장차관을 임명하는 일들로 연일 시끌벅적하다. 청문회를 통해 공개되는 장관 후보자들의 면면이 참으로 가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록이동색이기는 장관 후보자들만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 감싸기와 비판으로 서로 날을 세우는 여야 정치권도 오십보백보다. 협치와 소통을 내세우며 이미지정치와 감성정치로 시작한 새 정부는 어느새 불치, 불통의 이미지로 얼룩져가고 있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인사원칙 5대 공약, 즉 병역기피, 세금탈류, 부동산 투기, 논문표절, 위장전입자는 인사에서 배제하겠다며 스스로 깨끗한 도덕적 정부를 약속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위장전입, 세금 탈류, 부동산 투기, 논문표절 인사들 투성이다. 거기에다 음주운전 등 사회의 고질적인 인사들도 있다. 그 중에는 비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장관 지명을 사퇴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후보자들은 당당하게(?) 인사권자의 임명을 기다리고 있다. 청와대 또한 검증 과정에서 이같은 사실을 대부분 인지했지만 국민감정 보다 자기 사람들 챙기기 같은 모습 또는 여기서 밀리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의한 뚝심(?)을 보이면서까지 이렇다 할 설명 없이 침묵으로
구원이 무엇인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들(sins)의 사면을 받는 것이다. 어떻게 구원 받는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구원 받는다(행26:17~18).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게 무슨 말인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이다(행20:21). 구원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이단들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도 제국도 외부보다 내부가 부패할 때 무너졌다. 죄 사함의 기쁨을 왜곡시키는 박옥수, 4 단계 회개를 주장하는 박무수, 자기가 보혜사 성령이라는 신천지 교주 이만희 등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이단들이 있지만, 교회 밖의 이단보다 더 무서운 게 교회 안의 이단이다. 교회 속의 누룩이다.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구세주(Savior)와 주님(Lord)으로 영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의 배후에는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가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가르침에 사람이 무엇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예수님을 자기 삶의 주님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민족의 결점을 지적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 민족은 ‘하나 되기 어려운 민족’이라는 것이다. 좁은 땅에 살면서도 남북분단보다도 남남분열의 어려움이 현실이다. 선거철만 되면 단골메뉴는 지역주의와 학연과 연고주의는 필요이상으로 강조되고 최근에는 급격한 문화적 발전으로 이념과 세대차이로 우리를 하나 되지못하게 하고 있다. 이 분열의 사회적 바이러스에 대해 누구도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한다 축구공 하나로 우리민족은 모든 것을 넘어서 하나 될 수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축구공에 집중되어 있었을 때 전라도 사람인지, 경상도 사람인지 인식할 필요가 없었다. 남녀노소, 교육의 정도, 출신학교도 물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하나였다. 나는 월드컵이 우리 민족사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은 우리도 하나 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 될 때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은 무한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신이었다. 작가 ‘마크 트웨인’은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에 넣어보았다. 그들도 얼마간의 적응기간이 지나고 친구가 되었다. 이번에는 침례교인과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을 한
노란 생강나무 꽃이 피던 날 기다리던 침례신문을 편지함에서 받아 들고서 1면 기사에서 ‘침례교 군종장교 5명 모두 최종 합격’을 읽으면서 아주 먼 발치 후배들인 강한빛, 이예림 선발자의 이름 과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소원하였던 침신 여선배들의 희망사항이었던가? 기나긴 세월을 지나서 이제 봄볕 내리는 뜰에 피어난 생강나무 꽃처럼 긴 겨울을 지내고 피어나는 남쪽의 붉은 동백꽃처럼 “알싸하고 향긋한” 꽃 내음으로 향기를 발하며 “응답된” 기도들의 열매인 것에 감사드린다. “여성목사”인준과 통과를 위하여서 그렇게도 찬반 토론으로 총회시 마다 눈물을 흘렸던 침신 여동문들과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의 찬성토론의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의 섭리 속에 늦게였지만 여성목사의 대문을 함께 열어주신 총회 대의원들의 생각이 오늘의 여성 군인목사를 “침례교 군종장교”로 합격 시켜주심에 찬사를 드린다. 오늘날 교단에 빛을 발하고 있는 여성 목회자들의 복음사역 현장을 볼 때 그리고 갑자기 소천하신 목사님들의 후임으로 사모님들이 소명으로 목사안수를 받아서 담임 목사님을 보필하던 그대로 그 목장에서 담임으로 교회사역에 차질없이 수행하고 있는 여성목사들을 볼 때 목회의 여정에서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이 종말의 시작이다.” 소설 ‘페스트(La Peste)’에서 알베르 카뮈가 한 말이다. 지금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5·9 장미대선을 코앞에 두고 있다. 전직 대통령 파면에서 비롯된 조기대선이요,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는 국가 위기상황에서 벌어지는 대선이다. 이 위기 상황에서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로 대변되는 좌파 우파의 날카로운 대립이 지금 대한민국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민족 공동체를 갈라놓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을 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분열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닌데…. 공동체를 좌파 우파로 나누는 분위기가 교회 안에까지 번지고 있다. 개인적인 정치 성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교회 안에 세상 철학과 가치관이 들어오게 되면 교회는 세속화된다. 분열이 일어난다. 충돌이 일어난다. 세상 철학과 교회 가치관이 충돌할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와 세상 나라(the kingdoms of the world, 마4:8)가 충돌할 때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