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은 한국문화에 정통한다. 의도적으로 배우지 않고도 한국말을 하며 연습하지 않고도 한국풍습에 익숙하다. 한국인에게는 김치와 된장냄새는 하늘이 내려준 향기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듣다보니 한국문화와 역사에 익숙하다. 애국가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작곡가는 고 안익태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무찌른 장수는 이순신 장군이고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처리한 애국자라는 것을 다 안다. 6:25 전쟁은 공산당 북한의 남침으로 시발되었고 그 전쟁에 3년이나 끌면서 수백 만 명의 군민간이 죽어간 슬픈 역사도 안다. 그 앞에 일제 36년 일본의 강제식민지 생활의 고통도 다 알고 있다. 2002년 월드컵 축구 4강도 알고 있다. 무슨 이런 상식적인 생활이야기를 이렇게도 장황스럽게 늘어놓느냐고 그리고 이런 상식적인 국민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문제는 어느 시험에도 출제되질 않는다. 왜 한국인에게는 이런 사실들이 상식화되어 있느냐가 의도적인 연구를 통해서 과외선생을 모시고 배우고 익히고 닦아서 아니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한국인은 한국 땅에서 출생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이사벨 여사의 사랑의 새 생명1970년 부산 동래의 거제리 남문침례교회 개척 시절, 생활고로 인하여 나는 당시 이사벨 여자중학교의 유금종 교장을 찾아가 개척교회 사정을 얘기하고, 이사벨 여중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후 여고에서 송광옥 교목을 도와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다. 나는 당시 신동혁 목사의 인격과 덕성 그리고 유금종 교장의 성실함과 고매한 신앙심에 감동을 받은 바 있다. 유금종 교장의 부군이신 신동혁 목사님은 이 학교의 이사장이고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인 안이숙 여사와는 이종사촌으로서 “복음 선교회”를 설립했다. 나는 이 학교에서 성경교육을 통해 여중고생들과 여러 가지 복음의 증거의 좋은 추억들이 있다. 무엇보다 이 학교의 설립에 공헌한 뒷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미국에 사는 이사벨(Isabelle)이라는 부인은 첫 아이를 해산하다가 갑자기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치의 병에 걸렸다. 그 부인은 치료를 위해 많은 재산을 들여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병이 더욱 악화되자 병 치료를 그만 포기하고, 기도하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왈레스(Dr, William wallance)기념 침례병원은 미국의료선교사로 중국에서 일생을 봉사하다 순교한 의사 빌 왈레스의 숭고한 뜻을 기념하고 6.25 동란 중 어려움에 처한 처참한 우리 민족을 돕기 위하여 1951년 11월 22일 미국 침례교 한국선교회에서 부산에 설립했다.현재 508병상을 갖춘 부산의 대표적 종합병원으로 성장한 침례병원은 지난 60여년간 일반진료, 복음전도 사업과 함께 극빈자 무료진료, 무의촌 진료, 33개의 개척교회를 세웠으며, 의료선교 및 우리나라 국민보건향상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그동안 전국에 침례교 목회자로 사역하다 병들면 돈이 없어도 일단 치료 먼저 해주었고, 지금까지 50% 치료비를 감면해주는 일에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혜택을 받아왔는지 모른다. 지난 주간 우리부부는 침례병원에 입원하여 그동안 불편했던 몸을 샅샅이 검진하고 여기저기 고장 난 부분을 치료 받았다. 60여년 간 사용했으니 고장도 나는게 정상이려니 생각하면서도 막상 MRI와 초음파 측정기 앞에서니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어떻게 관리했는가에 대한 평가를 받는 것 같아 결과가 나오기 까지 약간 긴장이 됐다.천국 문 앞에 서면 이런 기분이 들까? 내가 너에게
가수 밥 말리의 조국은 자메이카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였던가? 언론보도에 의하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나라였다. 자메이카는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 카리브해 북구에 있는 나라다. 16세기부터 스페인과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아픈 역사를 가졌지요, 또한 1830년대에 서인도제도에서 흑인 노예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1962년에야 영국 연방내의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오랫동안 스페인과 영국의 지배를 받은 탓으로 허약한 나라이며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 못한 나라였다. 그런데 이 나라가 우사인 볼트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때문에 유명해졌기도 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온 세계 사람들의 정서에 다가 그 나라를 기억하게 만든 것은 레게(Reggae)음악을 퍼트린 가수 밥 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밥 말리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던가? 모 일간 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밥 말리를 소개하고 있었다 :「밥 말리는 1945년 자메이카 수도인 킹스턴의 빈민가에서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일찍 아버지를 여읜 말리는 가난하고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 불렀던 그는 쓰레기통에서 찾은 잡
“양남댁”이라 부르는 여승은 절간에 드나드는 길에 우리 집에 자주 오셔서 염불도 하고 식사대접을 받으셨다. 여승은 어머니에게 자식들이 잘 되어야 하고 특히 큰 아들이 잘 되어야 집안이 잘 풀린다고 하면서, 큰 아들을 보니 북두칠성 정기를 타고 났으니 절간에 있는 ‘칠성단’에 팔아야 한다고 꼬셨다.귀가 솔깃해진 어머니는 국민학생인 나를 꼬셔 주사골 봉래폭포 위에 있는 석굴 절간으로 데리고 가면서 목욕을 세 번이나 하고 쌀 한 말을 머리에 이고 올라가서 여승이 시키는 대로 큰 부처, 작은 부처, 보살 부처상 앞과 칠성단에 각각 7번씩 모두 28번 절을 했더니 절간에 내 이름이 그날부터 오르고 나는 소위 “불자”가 되었다. 1948년 이후부터 나는 어머니를 따라 절간을 오르락 내리락 했었다.그런데 유교신봉자인 부친이 사귀 들려 고치려고 불공, 무당굿, 병원, 신침, 부적 등 온갖 일을 다 했으나 효험이 없던 차 저동침례교회에 나가서 낫자 온 가족이 교인이 되었고, 양남댁의 며느리 정수희 자매도 그 즈음 사귀병에 걸렸는데 불공은 말할 것도 없이 드렸고, 한의사 덕산 어른에게 귀신 떼는 신침도 효험 없고 아버지처럼 온갖 수단을 다했으나 낫지 않았다.양남댁 여승의 불공
어느 날인가 환자심방을 준비하면서, 요한복음 5:2~9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곤란해 하시거나 못 고치신 영육간의 병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니까, 베데스다 못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음에도 38년 된 병자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병자는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서 물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이런 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확실한 것은 이 환자는 병에서 낫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단과 열망이 이 병자를 38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베데스다 못가를 찾아오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망에도 38년간 문제를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하는 인생의 핵심은 “열정”이라고 말합니다. 열정이 있는 인생이 무엇이라도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듯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정직하게 둘러보면, 누구보다도 열정을 가졌으면서도 어떤 영향력도 없이 스스로에게도 만족하지 못하는 인생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뭔가 보다 근원적인 것이 빠진 것입
(2012-2013)3월에는 일본의 쓰나미 피해 지역을 세명의 아시아침례교 여성연합회 임원들이 방문해 위로했다. 일본 침례교 총회와 여성연합회들은 피해 지역에 캠프를 설치하고 자원 봉사자들을 파송하여 열심히 돕고 있었고 우리의 방문을 매우 고마워했다. 또한 그 지역의 크지 않은 한 침례교회가 열심히 쓰나미로 가족과 모든 것을 잃은 피해자들을 돌보고 있었고 우리는 그 교회의 사역을 견학하며 목회자 부부와 성도들과 함께 쓰나미 피해자들을 방문 위로하는 기회를 가졌다. 주일 예배 중 설교시간이 됐는데 목사님이 갑자기 단위에서 내려오셔서 한국과 대만, 필리핀에서 온 우리 임원들 앞에서 일본 조상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허리를 굽히셔서 우리는 당황했지만 한편으론 큰 감동을 받았다. 일본을 떠나오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쓰나미를 일본 땅에 보내 주시어 일본인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그들이 주님을 만나 살 소망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그 땅을 떠나 왔다.6월 25일부터 30일까지 칠레에서 세계연맹 여성부 실행이사회를 개최했는데 우리는 모든 회의를 마치고 그 지역 여성들을 초청해서 가지는 여성 모임 장소로 이동하기 전 지진 지역을 방문하고 교회와 여선교회를 위
「몇 년 전 나는 아내와 함께 미국 뉴욕 시가지를 거닐다가 갑자기 반갑게 맞이하는 길손을 만났다. 나는 인적상황을 즉각 인지하지 못해서 당황해 하고 있었는데 그가 한국에 있을 때 모 세미나에서 나의 강의를 잘 들었고, 지금까지 그 강의 내용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와 아내를 이끌고 바로 그 옆 레스토랑으로 인도해서 푸짐한 대접을 해주었고 헤어질 때 몇 푼의 달러까지 지어주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뉴욕까지 움직이기를 잘했다고 했다. 움직이면 밥 생긴다. 동즉식(動卽食).명동거리를 다니다가 모 교회 장로님을 만났고 그가 커피숍으로 인도해서 커피 한잔을 들면서 “율법과 복음을 갈라놓기에 명수(名手)목사님, 여생 다할 때까지 꼭 잘 전해주세요”라고 미니 세미나를 한 뒤 봉투가 없다면서 갈색종이 몇 장을 집어 주는 것이 아닌가? 명동거리에 오기를 잘했지, 집에 들어앉아 있었더라면 뭣하나, 움직이면 밥 생긴다. 動卽食(동즉식)이다.나는 직장 연금이 없이 노년을 살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날보고 역마(驛馬)살이 끼여서 한곳에 오래 못 붙어 있고(?) 옮겨 다닌다나. 과연 그런가! 출판사, 신학교, 목회 등 골고루 돌아다녔다. 나는 십자군 사단의 연대장이다.
송아지 봉헌에 암소까지 죽어1960년 2월 저동교회 임암천 목사님께서는 나에게 “강성찬 전도사님을 부흥강사로 초청하고 싶으니 알아보고 청빙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경북 산골 고령까지 먼 길을 찾아갔다. 농촌교회를 개척한 총각 강전도사는 마침 자체 부흥회를 하고 있었다. 집사님 내외분을 불러서 “멀리서 한 선생이 손님으로 오셨는데 방이 이렇게 차가워서 되갔소, 군불을 잘 넣고 또 반찬도 계란 같은 것이나 생선도 밥상에 오르게 하이소”라고 힘있게 일러주었다. 식사 대접을 잘 받은 후 저녁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따뜻한 방에서 잘 자고 나서 이튿날 나는 강성찬 전도사님을 저동교회 부흥강사로 모시기로 허락받고 모교회 임암천 담임목사님께 통지해 드렸다. 세월이 흘러 강성찬 전도사님은 목사님이 되셨고 부산침례교회에 부임하신 후 그분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해서 간증을 듣게 되었다. 그는 평안도 정주의 농부의 아들이었고 선친은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잘 믿었다. 마침 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농토는 공산당에게 빼앗겼고, 그때는 소 두 마리가 전 재산이었다. 어머니는 그 중 송아지를 기쁜 마음으로 건축헌물로 바쳤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연자 맷돌을 돌리던 건장한 어미
(2009-2012)2009년 1월 인도의 캘커타에서 내가 아시아 침례교 여성 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나는 자동으로 침례교 세계 연맹 여성부 부회장, 세계연맹 상임위원, 아시아 태평양 침례교 연맹 실행위원이 됐다. 나의 본업인 전국 여성선교 연합회 총무는 자동으로 교단 해외선교회 이사 및 시취위원으로도 섬기게 된다. 2013년 말 은퇴시 까지 5년 동안 나는 내게 주어진 수많은 사명들을 감당하기 위해 휴가도 없고 주말과 주일에도 예배후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 그 모든 것을 감당 하도록 하나님은 내게 건강과 지혜와 돕는 자들을 보내 주셔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모든 사명을 완수하게 해 주셨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린다. 2009년에는 서울에서 첫 실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인도와 대만 침례교 여성연합회 총회의 주강사로 섬겼다. 인도 대회는 인도안의 또 다른 국가라 할수 있는 나갈랜드에서 개최되어 대회후 그 곳 선교목사님의 안내로 시골 오지 마을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 할 기회를 가졌고 이 방문은 후에 연세 중앙 교회 윤석전 목사님의 나갈랜드 집회로 연결되고 나갈랜드 총회와 한국 총회가 자매 결연을 맺게 되는 다리
행운목(Dracaena)은 인도네시아와 필리핀등 열대 동남아시아에서 수입되어온 관엽식물입니다. 꽃말은 ‘행운’이며 영어로는 Lucky Tree라고 부릅니다.행운목(幸運木)은 토막으로 식재를 하기 때문에 뿌리가 충실하질 않아 좀처럼 꽃을 볼수 없고 열대 지역에서도 잎만 무성할 뿐 꽃을 보기가 아주 어려운 관엽식물로 사람의 일생에 한번 볼까 말까하는 식물입니다.저녁 해질 무렵에 활짝 만개하여 다음날 새벽녘에 꽃이 지기를 반복하며 백합향을 능가하는 향긋하고 그윽한 향기에 생명력의 소중함과 강인함을 나타냅니다. 2001년 노은교회를 새로 짖고 입당 할 때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은 이 행운목 한 그루가 저희 집 거실 모퉁이에 오랬동안 있었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아 생각나면 한 번씩 물을 주는 정도여서 화분갈이나 영양 있는 비료를 준적도 없습니다. 엊그제 아내가 이 행운목이 꽃을 피기 시작했다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10여년 전에 한번 피고 지금 다시 감추었던 얼굴을 수줍은 듯 내 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꽃망울을 머금은 꽃수술대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솟아오르며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꽃들은 매년 꽃을 피우는데 어찌 이 행운목은 10여년 긴긴
한때 “가요무대” 프로를 없애자고 하자 70대 대한민국 노령자들이 벌떼같이 반기를 들었다. 나도 그런 노령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왜 그런 반기를 들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안다. “가요무대”에 나오는 노래는 해방 전후 그리고 6:25전쟁전후 극한 가난과 국난 중에 사람들의 마음을 만져주던 그런 청량제 소리였었다. 나도 10대 소년시절 전쟁 중에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한 시간 수업이 끝나고 쉬는 가간엔 뒷동산에 올라가서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합창하다가 종이 울리면 교실로 들어왔었다. 다음 쉬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또 때가 되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군행진곡도 불러재켰다. 말하자면 1950년대를 전후한 노래가 그 시절에 향수를 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령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일주일 내내 고대하던 “가요무대”를 빼버린다고? 안될 말이지. 그런데 내가 “가요무대”를 즐기는 일반적인 이유 외에 특별한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요무대”는 옛날 가수들의 노래를 지금의 젊의 가수가 불러보는 계획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그 옛날 가수들의 현황을 방송국 직원이 가서 촬영해 왔고 그것을 방영했다. 그들은 늙었다. 병들었다. 시들었다. 황혼을 맞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예수의 이름의 뜻은 구원자이시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고, 주님께서는 그의 살아계신 이름과 권세를 우리가 기도할 때에 사용하도록 인장을 우리 성도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 마가의 다락방 강화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2-14, 15-16, 16:24-26))고 여러 번 약속하셨다. 그 약속으로 우리는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의 인장을 찍어 응답을 받는다. 예수님의 이름도 있는가?교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한번은 교황 이노센트 2세(Innocent Ⅱ)를 방문하였다. 교황은 한 웅큼의
결혼을 앞둔 신부들이 결혼 전 날까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나 지금 이 결혼을 해도 되는 걸까?’ ‘정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것은 이제는 비밀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질문은 결혼 전의 신부들만 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황만 다르지 우리는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이런 질문들을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던지기 때문입니다. 교회 임직식을 준비할 때 전날까지 담임목사가 상담하는 내용 중에는 “제가 이 직분을 정말 받아도 될까요?”라든지, “저는 합당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요?” 같은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 역시 목사안수를 받을 때 이 질문을 저에게 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내가 목사가 되도 될까?’ ‘내가 정말 이 직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이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저서 제목 중에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꼭 저에게 하는 질문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번민의 밤을 지나 정신없이 목사가 된 후에는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목사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신을 하나씩 더 확실하게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도사 때는 멋모르게 해대던
(2010)2010년 3월 29일은 전여회가 2009년 5월에 기공감사예배를 드리고 건축을 시작했던 사랑의 집의 준공 감사예배를 드린 뜻깊은 날이었다. 전여회 사랑의 집은 1996년 6월 사랑의 집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도하며 시작한지 14년만에 결실을 맺었다.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없어 고민하며 기도했는데 2008년 마침내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모든 일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경서지방 남부교회 임대식 목사님이 선친께 물려받은 경북 김천시 부곡동 180번지 2,342평의 전망 좋은 땅을 기증해 주셔서 전여회는 11월 4일 대지 등기 이전을 마치고 2009년 4월 ENG종합건설과 건축계약을 맺고 건축을 시작하였다. 수원중앙교회를 섬기시는 우경애 증경회장님이 추진위원장으로서 이 일에 남은 생애를 걸겠다고 헌신하였고 조혜도 증경총무님은 제일 먼저 가지신 것의 모든 것이라며 힘에 겨운 헌금을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건축을 위해 마치 우리들의 등을 떠미시는 것만 같았다.추진위원회는 기도하며 모금 계획을 세웠는데 사랑의 집 방이나 식당, 휴게실, 사무실등에 3000만원의 헌금을 하는 교회나 개인의 명단을 부착해 드리기로 했다. 전여회는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