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CCC에서 활동하던 시기, 순원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역사서 중 한 부분을 읽고 이 내용을 토대로 순모임을 진행하기 위해 지금 읽은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요약해 볼 것을 순원에게 지시했다.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알기론 아버지가 장로님인 모태신앙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비유가 있는 것도 아닌 역사서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대체 뭐가 어렵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의 개역개정판이 현대에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로 가득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가 되고 나서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의 벽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처음에 ‘희년’이 뭔지 알지 못해 인터뷰 기사를 작성하다 혼나기도 했고 증경총회장이란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 지 알지 못했지만 괜히 누구에게 물어봤다가 웃음거리가 될 까봐 대충 전직 총회장을 그렇게 부르는가보다 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사실 ‘증경’(曾經)이란 단어는 국어사전에도 없고 일반 사회에서는 쓰이지 않는 옛말이다. 교단에 공헌한 경력을 가진 분들을 예우하는 마음에서 그분의 전직을 계속 호칭으로 사용하다 보니 증경총회장, 증경지방회장 등의 호칭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증(曾)은 ‘
우리교단 총회 기관들 중에 창립 70년을 맞이한 기관이 있다. 바로 교회진흥원(이사장 박대선 목사, 원장 김용성 목사)이다. 교회진흥원은 침례교회와 한국교회가 신약 성서적 모범 교회로 성장하고 잘 전하기 위해 그 사명과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관이다. 특히 교회진흥원은 선교와 목회, 교육활동을 위한 목회연구 및 프로그램 개발, 기독교 정보 및 자료 출판, 기독도서와 교회용품 보급 등을 진행해 왔다. 목회자의 재교육과 성도들의 신앙교육 등을 감당해온 교회진흥원의 70년에 진심으로 축하와 박수를 보낸다. 그동안 교회진흥원의 발자취는 우리 한국 침례교회의 성장과 함께 달려온 길이고 우리교단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위대한 업적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침례교단의 교회들이 재건됐지만 당시 재건에 필요한 교육이나 자료, 출판물은 한없이 부족했다. 교단과 제휴했던 미남침례교 해외선교부(IMB)의 도움이 있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다양한 목회 자료와 교육 자료로 침례교회가 자생할 수 있었다. 특히 교회에서 사용하는 물품과 전도물품, 비품들 또한 교회진흥원을 통해 조달을 받으면서 교회 사역에 적잖은 보탬을 주고 있는 곳이 교회진흥원이다.
의미를 찾는 것에 진심인 한국교회에게 2024년 또한 여러 이벤트들이 기다리고 있다. 올해는 엑스폴로74(Explo’74)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인 동시에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기로 예정돼 있다. 엑스폴로74의 경우 사람들의 관심이 크지 않아 보이는 한편 로잔대회의 경우 준비위가 예정하고 있는 다채로운 행보와 더불어 로잔언약의 기본 정신을 상실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로잔대회는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였던 빌리 그래함과 존 스토트가 주축이 돼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진행된 대회가 시초이다. 이 대회는 전 세계 모든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참여하면서 운동으로 확장돼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로잔운동은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자”는 문장으로 축약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전 세계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아이디어들을 연결하는 것을 핵심 사역 방향으로 삼고 있다. 1974년(스위스 로잔), 1989년(필리핀 마닐라), 2010년(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이어 올해(대한민국 송도)에 50주년 기념 제4차 대회가 열리는 것이다. 한국로잔위원회(의
우리 교단의 유일한 신학교인 한국침례신학대학교(총장 피영민, 한국침신대)가 지난 2월 6일 학위수여식을 진행하며 교단의 인재들을 배출했다. 학부와 대학원, 연구원, 평생교육원, 박사 등 총 405명의 교단 일꾼을 배출한 한국침신대는 침례교단을 대표하는 신학교이다. 수많은 목회자들과 졸업생들이 한국침신대를 통해 신학을 배우고 영적 분별력을 키우며 자신이 받은 소명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선교사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한국교회의 교단 신학교에 대한 크고 작은 문제는 우리 한국침신대 역시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학부 신입생은 100%를 채우지 못했다. 수시와 정시를 통해 침례교회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뽑아야 함에도 학령인구 감소와 비수도권지역, 신학 이외에 특화된 학부가 거의 없는 것 등은 교단신학교의 존립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한국대학평가원에서 주관하는 대학기관평가인증은 우리의 선지동산이 계속해서 존립할 수 있느냐를 놓고 수많은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지난 3주기 대학평가에서 총 54개 학교가 인증을 받았으며 이 가운데 신학교는 목원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한국성서대학교, 한세대학교 뿐인 것으로
한국 침례교단은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선교사가 1889년 12월에 내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945년 해방 때까지 침례교회(동아기독교)는 북한에 60개, 남한에 40개, 재만・재러에 150개의 교세를 형성했다. 이는 선교지 분할협정(comity)으로 인해서 장로교와 감리교는 서강동약(西强東弱)의 특징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에 강한 교세를 형성했지만, 우리 침례교단은 원산 총부를 중심으로 함경남북도에 교회를 집중적으로 세운 동강서약(東强西弱)의 교세를 형성했다. 1945년 해방된 지 3년이 지난 1948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이 된 이후 북한의 침례교회(동아기독교)는 해체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교회는 침례교를 비롯해 장로교・감리교는 모두 사라졌고 북한 당국이 공인한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외에 가시적 교회는 사라졌다. 그러나 두 가지 형태로 북한에서 교회는 존재하고 있다. 그 첫째는 분단 이전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과 그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한 ‘그루터기 교회’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급성장한 새로운 교회의 형태인 ‘지하교회’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인 90년대 중반 이후 남한으
존 로스는 조선어(한글)를 몰라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고려문에서 조선인들을 만나더라도 복음을 전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에게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 청년의 이름은 ‘이응찬’이었다. 이응찬은 무역 상인으로 조선에서 물건을 배에 싣고 중국(청나라)으로 가려던 중, 압록강에서 풍랑을 만나 모든 재산을 잃었다. 비록 그는 겨우 살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과 허탈감 속에서, 고향에도 못 돌아가고 하루 끼니를 동냥하며 고려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문에서 서양 종교를 전하는 양인(洋人)에게 가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응찬은 배고픔에 존 로스를 찾아온 것이다. 존 로스는 행색이 초라했던 이응찬을 보고, 더구나 그의 사정을 듣고 참으로 마음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당시 존 로스는 당시 이응찬과의 만남을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중인계급(中人階級)에 속하는 사람 하나가 배에 물건을 싣고, 고려문(高麗門)으로 오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가 그만 갑자기 강한 서남풍(西南風)을 만났다. 그 배는 전복되었고, 물건은 물속으로 잠겨버렸다. … 물건 임자는 목숨은 건졌지만, 알거지가 됐다. … 비참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 그 사
113차 이종성 총회장의 총회장 직무가 정지되면서 총회는 1부총회장인 홍석훈 목사(신탄진)가 총회장 직무를 대행하는 체제가 됐다. 이로 인해 113차 총회가 주관하는 대부분의 사역들이 연기되거나 취소됐다. 우선 오는 2월 5~6일에 있을 예정이었던 전국 지방회 간담회와 총회 전도사역인 100만 뱁티스트 전도운동, 상반기 교단 최대의 행사인 목회자부부영적성장대회는 타격을 받게 됐다. 또한 총회도 비상체제로 바뀌면서 일반적인 총회 행정만 집행이 가능하며 최소한의 사역만 진행하는 상태이다. 현재는 법적인 분쟁의 결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직무대행체제임에도 불구하고 113차 총회가 추진하는 사역들이 일순간에 멈춰선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직무대행이라 할지라도 교단 총회는 침례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섬겨야 한다. 그동안 총회 사역이 특정 집단이나 개교회의 이익을 위해 진행한 사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 침체된 교세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사역들이다. 그렇기에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현재 준비하고 있는 113차 총회 사업들은 연속성과 지속성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교단의 미래를 생각하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자리가 필요하
엄마에게 프리지어 한 다발을 사다 줬다. 못다 핀 꽃봉오리 사이로 노란빛을 야금야금 드러내며 한동안 비어있었던 유리병을 채웠다. 아마 초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엄마는 노란 꽃을 볼 때마다 당신이 좋아하는 예쁜 프리지어 이야기를 해왔을 것이다. 꽃집을 나와 집에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 한 시간 동안, 창밖의 쏜살같이 지나가는 어지러운 풍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자 옹기종기 모인 찬란한 꽃봉오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이사이로 보이는 노란색들이 엄마 얼굴을 서물서물 떠올리자 가슴이 시큰하게 저며왔다. 우주의 9번째 자리를 채우던, 그러나 태양계에서 쫓겨나 영원히 이방인이 된 소행성. 나는 명왕성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도저히 맞물리지 않는 두 문짝이 서로를 자꾸 긁고 밀다가 생겨난 부스러기처럼 이곳저곳을 굴러다녔다. 세 살 때부터 따로 살았던 부모님, 두 사람이 다시 함께 살게 된 후로도 밥 먹듯이 쌌던 이삿짐. 뿌리내릴 새도 없이 나는 어떤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부표 같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외로웠고 지긋지긋했다. 겨우 한 가족이 자리를 잡아 같은 동네에 산 지 두 해를 넘기자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그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머지않아 깨닫게
새해 시작부터 교단이 시끄럽다. 현재 113차 총회 의장단 선거에 대한 법적인 송사가 계속되면서 총회적 위기 상황이 개 교회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부 대의원들은 “내편 네 편”으로 갈린 의견을 총회 자유 게시판에 쓰고 또 언론들은 침례교단 송사에 대한 결과를 보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다수 목회자들은 송사 문제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서울남부지방법원 2023가합 108235 총회장선거 무효확인 사건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침례교단 총회는 직무대행체제로 가라고 판결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보다 냉철한 입장으로 이 문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먼저 법적인 논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이유와 현재 진행상황은 분쟁의 당사자들이 준비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이로 인해 당장 교단 총회의 신뢰가 무너지고 2024년 침례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목회 사역들에 적잖은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언론을 통해 이미 관련 보도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대의원들은 침례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사람들보다 앞서 성도들의 시선을 의식했으면 한다. 그동안 교단은 코로나 팬데믹 가운데에서도 교회를 일으키고 살리는 일에 매진해 왔다. 기
최근 한 은퇴 목회자가 이중직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히며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는 야구선수 추신수를 언급하며 이중직을 하는 목회자들을 향해 프로의식이 없다는 식으로 질책했다. 추신수와 목회자들의 상황이 전혀 다르기에 잘못된 비교이긴 하지만 큰 맥락에서 보면 보수적 사고를 지닌 목회자들의 목회관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목회환경은 갈수록 험난해지고 있고 이제 이중직의 가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2023년 초 지앤컴리서치가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의뢰로 조사한 설문에 따르면 49명 이하 소형교회 목회자들의 경우 최저임금보다 낮은 사례비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는 월평균 216만 원으로 2017년 176만 원보다 23% 증가했다. 사례비 외 기타소득은 평균 86만 원으로 2017년 108만 원보다 22만 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고, 월 사례비와 기타소득을 합한 총소득은 2023년 302만 원으로 2017년 283만 원보다 7%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목회자 총소득 302만 원은 2023년 한국의 4인 가구 기준의 중위소득인 540만 원의 56% 수준이다. 교회 규모별 사례비 수준을
다사다난했던 2023년을 뒤로 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침례교회도 새 시대를 준비하고 새 시간을 맞이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2024년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2024년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을 선언한 엔데믹 이후의 새롭게 맞이하는 해이며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하다. 새로운 변화를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만큼 설레게 하는 것은 없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뜻과 계획을 교회와 목회자가 잘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2024년 113차 총회도 여러 도전과 떠안고 있는 숙제들을 해결해야 할 상황이다. 대사회적으로는 저출산문제, 국제 분쟁으로 인한 국제경제 위기, 한반도의 불안한 안보 상황, 고물가 현상으로 빚어진 경기침체 등은 우리가 실제로 피부로 느끼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근심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이로 인한 사회불안과 정치 갈등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문제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교회도 사회적 현상에 따른 위기를 함께 겪고 있다. 저출산 문제는 당장 다음 세대의 부재로 나타났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저출생이 심각해지면서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이 처음으로 30만
전 세계 이용자가 5억 명에 달하는 외국어 학습 앱인 ‘듀오링고’에 따르면, 한국어는 전 세계에서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다음인 다섯 번째로 인기 많은 외국어다. 그만큼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공부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1위다. 구글 트랜드에 따르면 전 세계 인터넷 사용자들이 구글에서 한글로 검색하는 총량은 최근 5년 동안 3배 가량 늘어났다고 한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언어학과에 따르면, 한국어를 가르치는 전 세계의 대학교 수는 1991년 151곳에서, 2022년 1400여 곳으로 무려 9.3배 넘게 늘었다고 한다. 한국어의 영향력이 점점 세계화가 되는 점이 감개무량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것’이라는 90년대 유행했던 말처럼, 현재 한국어의 세계화 돌풍이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감사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지만, 한글의 띄어쓰기를 최초로 교재에 도입하고, 신약성경을 한글로 최초 번역한 ‘존 로스 선교사’가 가장 많이 떠오르는 시점이기도 하다. 물론 한글 창제의 주역인 세종과 그의 자녀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는 성경말씀이 있지만 우리는 늘 새로운 한 해를 기대하는 가운데 맞이한다. 지난 2023년을 맞이할 때와는 또 다른 2024년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지난 한 해는 코로나로 인해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다가 다시 문을 열고 활동을 재개한 해이다보니 많은 부분에서 우려와 기대가 혼재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후 많은 교회들이 기지개를 폈지만 양상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수만명이 출석했던 교회에 눈에 띄게 빈 자리가 생기기도 하고 다시금 코로나 이전의 예배를 회복한 교회들도 상당수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교회의 사역은 코로나 이전과 비교했을 때 약 60% 정도 회복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교인들의 예배 참석은 약 85%까지 회복됐으나 점점 회복세가 둔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엔데믹의 환경은 많은 부분이 예전과는 다르다. MZ세대라 불리는 이들의 개인주의는 코로나 팬데믹과 맞물려 더욱 개인적인 성향을 두드러지게 나타냈고 이와 동시에 오프라인 문화에서 온라인 문화로의 전환을 빠르게 전환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교회 또한 여러 노력을 통해 발을 맞춰 나가려 하지만 과연 그러한 것이 교회의 본질인가 하는 부
우리는 과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통일은 외부의 노력이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을 위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우리가 감당하며 나아가는 것이 통일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통일선교와 통일운동에 정부와 협력도 하며 인도적 차원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하지만 정치적 편향성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교회의 통일 운동의 방향성은 개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이 감당하기에 이념적인 개념에 불과하는 한계를 겪기도 했다. 우리교단도 북한선교와 통일선교를 감당하는 사역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를 주도적으로 감당했던 국내선교회와 해외선교회, 전국여성선교연합회는 기관 본연의 사역에 집중한 나머지, 북한선교와 통일선교에 안타깝게도 한목소리를 내지 못해왔다. 개교회도 통일선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는 개교회의 또 하나의 선교 사역으로 이뤄지며 교단내에서의 협력보다는 전문적인 기관의 도움을 받아 사역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와 같은 동포를 생각하는 마음, 그들을 향한 복음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끊임없이 북방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해왔으며 자유를 찾아 온 이들을 복음의 품에 안았다. 또한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조선선교를 준비하는 존 로스는 조선의 무역상을 찾고 있는 시점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개신교단 중 세계에서 주류 교단인 침례교단은 한국에서 왜 이리 교세가 약할까? 왜 한국에는 장로교단이 득세할까? 이것에 대한 이유들은 여러 가지 난무하다. 이에 대표적인 몇 가지를 간단히 열거하자면, 첫째는, 일제 강점기 때 장로교단은 신사참배를 했는데, 침례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일제의 탄압을 받아 교세가 줄어들었던 점. 둘째는, 침례교의 정신을 가지고 있던 펜윅 선교사가 타교단 선교사와는 다르게, 한양에서 활동하지 않고, 지방 및 외각에서 활동했던 점. 셋째는, 침례교 선교사들이 한양 외 지역에서 활동했을 뿐더러, 타교단 선교사에 비해 의료 등 특별한 기술이 없었던 점. 그래서 한양에 병원이나 학교 등을 세워 기관사역을 하지 않았던 점. 때문에 당시 고종을 비롯한 조정 관리들과 친분이 없어 조정의 여러 지원을 받지 못했던 점. 넷째는, 침례교의 개교회주의 때문에 조직력이 약했던 점. 다섯째로는, 침례교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동아기독교 1921년 명칭 변경)의 설립이 1906년이라, 타교단보다 조직형성이 늦어졌다는 점.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과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