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救贖)과 구원(救援)1970년대 말에 각 교단이 사용하는 찬송가를 하나로 통합하는 큰 작업이 시작되어서 참여 교단에서 추천받은 인사들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선곡과 가사 수정작업에 들어갔다.그 때 제안된 의견들 가운데 가사에 많이 사용된‘구속’이란 말이 범죄 혐의자를‘구속(拘束)’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으므로 모두‘구원’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아서 모두 고치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여러 곳에서 ‘구속’이 ‘구원’으로 고쳐졌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구속하신 예수께서”하고 찬송하면서 “체포하신 예수께서”라고 생각하는 신자가 어디 있겠는가. 구속과 구원은 의미가 약간 다르다. 찬송가 뿐 아니라, 성경과 신학에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구약성경에서(1) 이사야 63장 9절에는 구원(가알)과 구속(야솨)이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대구(對句)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자기 앞의 사자(使者)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2) 호세아 13장 14절에서는 구속과 속량(贖良)이 같은 의미의 다른 낱말로 대구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파다)하며
어느덧 우리 교회가 창립 53주년을 맞고 보니, 새삼 내 인생과 함께 했던 ‘교회’에 대한 추억이 새롭다. 과연 ‘교회’는 내게 무엇이었던가? 어떤 의미였던가? 생각해보니 말할 것도 없이 교회는 내게 전부였다.난 교회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리고 어머니 품에 안길 수 있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유치원도 교회 유치원을 나왔다. 노래도 교회 어린이 합창단에서 배웠다. 이렇게 남 앞에 서서 말하는 재주를 갖게 된 것도 중고등부 시절, 교회가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녀오면 난 늘 교회에 가서 놀았다. 교회에서 숙제도 하고 공부도 했다. 재밌는 노래와 율동과 놀이 역시 다 교회에서 배웠다. 물론 연극도 기타도 교회에서 배웠다. 친구도 교회에서 사귀었고, 청소년기 가슴 속 첫사랑도 교회 여학생이었다. 집안이 어려울 땐 교회에서 주는 쌀을 먹었고, 교회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학교도 다녔다. 여태껏 난 교회를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가정형편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 갔어야 할 상황에도 “교회 때문에 안된다”며 내가 나서서 강력히 반대했다. 교회가 좋았기 때문이다. 난 인생의 진로도 교회에서 정했다. 인생의 반려자도 교회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통의 부재와 단절로 인해서 아우성치며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어떻게 하면 소통을 원활하게 할까 라는 질문가운데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그 해법을 찾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 국가와 세계가 소통되지 않는 인간의 문제들로 인해서 심각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소통을 회복하여 소통이 단절된 세상에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소통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소통은 기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빠른 소통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소통의 단절의 시대라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소통의 단절의 시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잠들어 있지 않은 이상 항상 누군가와 소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서 까지도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통의 기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소통의 홍수 가운데 살면서도 이것은 통신과학이 가져다준 결과일 뿐이라고
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심판석에서 “더 이상 죄인의 신분이 아니고 이제는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설명하면 칭의의 개념을 성화의 개념과는 무관한 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경험했던 과거적 구원의 사건으로만 이해했다는 점이다.그러나 이신칭의의 개념에는 법정적인 체계만이 아니라 “관계적인 체계”(Relational System)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았다”는 면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는 면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 즉 “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되심(Lordship)과 그 분에 대한 나의 종됨(Servanthood)”의 관계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은 신자는 육신의 장막을 벗는 영화(Glorification)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신칭의를 단순히 예수 믿는 순간 얻게 되는 신분의 변화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변화된 신분을 가진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주
인사와 소개안면이 있는 사람끼리 만나면 서로 인사하면 되려니와 낯 선 사람을 만나면 누구인가 소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동행인을 소개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예를 그르치는 일이 잦은 것 같다.어떤 모임에 초청을 받고 참석했는데 초청인이 자기를 소개해주지 않으면 참석자는 자신이 가지 못할 자리에 갔거나 무시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소개를 받지 못하자 스스로 일어나서, “저는 … 라고 합니다” 하고 자기 소개를 하는 이도 보았다. 공사(公私) 간에 동행인과 함께 낯 선 사람을 만날 때는 상대방에게 자기의 동행인을 소개해야 한다. 기성 목회자들은 누구나 소개 받고 소개하는 것에 대해서는 달인의 경지에 있을 것이다. 목회실습 기간에 눈여겨보면서 익혀둘 항목이다. 바른 호칭1960년대 말 한미전도대회에 참가하는 텍사스 주 전도단을 맞이하기 위해 김포 공항에 간 일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서 함께 주차장에서 차를 기다리는 중에 전도단 인솔자 칼빈 비치 목사가 내게, “하우 켄 아이 어드레스 유?” 하고 말했다. 나는 그가 나의 집이나 일터의 주소를 묻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런 쪽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런데 그 질문이 석연치 않아서 당시
가족 중 누군가의 치매가 의심될 때 각 지역자치센터로 문의하면 명칭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하여튼 “지역치매지원센터” 같은 곳으로 안내를 해줍니다. 안내받은 대로 방문을 해보면 여러 가지 검사를 걸쳐서 최종 치매여부 판정을 내려줍니다. 초기치매인 1기부터 심각한 말기 치매까지 판정에 따라 단계별로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도 해줍니다. 새삼 우리나라가 재정적자가 심각하다고는 해도 의료복지가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런 치매의 정도에 따른 판정 말고, 가족들끼리 하는 말로 착한 치매, 고약한 치매 같은 분류들도 있습니다. 그 중 착한 치매는 그래도 가족들이 견딜만한, 크게 사고치지 않는 얌전한 치매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치매가 심각한 분들은 가족 누구도 못 알아보고, 폭력과 폭언을 행사하기도 하고, 자주 집을 뛰쳐나가 찾는데 애를 먹게도 하고,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소위 착한 치매는 그런 보여지는 대단한 어려움이 없어 그렇게 부릅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그렇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죄를 얘기할 때, 죄를 조금 지었다고 좀
둘째로,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공통적으로 로마가톨릭 교회의 전통이었던 유아세례(Infant Baptism) 행습을 견지하였다. 유아들에게 뱁티즘을 베풀기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신약성경 어디에도 갓난 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뱁티즘을 베풀었다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에게 안수를 베푸셨고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말은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 부모나 어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을 가지라고 권면하셨지만, 성경 어디에도 인지능력도 없고 신앙고백을 할 수도 없는 갓난 아기(영아)나 어린 아이(유아)에게 뱁티즘을 베푸셨다는 기록이 없다. 예수님이 어린이들에게 “안수”하셨다는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안수보다 더 중요하고 복잡한 절차를 요하는 “뱁티즘”을 그들에게 베푸셨다면, 왜 그 사실이 네 복음서들에 기록되지 않았겠는가?단지 유아세례를 옹호하는 신학자들과 종교개혁가들은 구약의 할례(Circumcision)가 신약에 와서는 유아세례가 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말이 없다. 유대인 부모들은 아들이 태어나
아람과 아랍아람은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의 아들로서 노아의 열 여섯 명의 손자 중 하나이다. 아람과 그의 권속은 팔레스타인 북쪽으로 올라가 요단강 동북부에서부터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 즉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살았다. 아브라함의 친족들이 밧단 아람과 하란의 아람 족속이었다는 사실과(창25:20,29:4) 모세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네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신26:5, 창28-46장) 아브라함의 뿌리는 아람 족속임이 분명해 보인다.한편, 롯의 두 딸이 낳은 암몬과 모압,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 그두라가 낳은 미디안을 포함한 여섯 자녀들 및 에돔의 조상이 된 에서와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남쪽으로 내려가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아랍민족을 형성했다‘. 아랍’은 그들의 거주 중심지 ‘아라비아’를 줄인말이다. 아람민족은 다메섹을 수도로 수리아(현재의 시리아)를 세워 한 때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기도 했으나(삼하8:6), 벤하닷 1세가 즉위하면서 세력이 강해지자 아람 지역 왕들을 동원해서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공했다(왕상15:18-20, 20장). 벤하닷 2세는 나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을 엘리사에게 보냈
세상에는 아비에게 패륜을 행하는 아들, 아비에게 반역하는 아들의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문학 작품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비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작품들도 있습니다.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4대 비극 햄릿, 오델로, 리어왕, 맥베드 등을 비극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테베왕‘오이디푸스’의 신화는 우리를 많이 슬프게 합니다. 자기의 친부인지도 모르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어머니 인줄 모르고 자기 왕비로 맞은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더 이상의 비극은 없을 것 같습니다.최근 우리 극장가에서 흥행한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조선 21대 영조 왕이 그의 둘째 아들 세자 ‘이선’을 뒤주에 넣고 죽인 슬픈 역사입니다. 하지만 어떤 역사나 작품, 신화도 비교 될 수 없는 슬픈 역사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던 다윗 왕 때 일어납니다.다윗 왕의 삼남 ‘압살롬’의 반역과 패륜사건은 너무 엄청나서 글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패륜아이고 반역자인 아들 “압살롬을 끝까지 사랑한 이 사랑에서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사랑을 발견하게됩니다.”사무엘하 15장은 압살롬의 숨길 수 없는 반역의 마음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김승진 침례신학대학교 교수가 최근 저술하 여 출간한 종교개혁가들과 개혁의 현장들(서울: 나침반출판사, 2015)에서“제9장 아직도 미완성인 종교개혁”의 내용 중 일부를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 하에 게재한 것입니다. 앞으로 몇 차례 나누어서 본지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http://mall.godpeople.com/G=9788931815023을주소창에 놓고 클릭하면 책에 관한 상세한 소개를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받았던 루터의 개혁사상은 새로 발명된 인쇄술로 인해 유럽의 각 도시 주민들에게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인문주의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던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은 물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정치지도자들도, 성직계급제도와 관료주의적인 교권체제의 타락한 교회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개혁에 공감하고 있던 일부 크리스천 정치인들은 은밀히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공공연히 개혁적인 사상을 가진 선각자들을 후원하였다.교회사학자들은 이처럼 세속권력가들의 후원을 입은 종교개혁을“관료후원적 종교개혁”(Magisterial Reformation)이라고 부른다. 이는 16세기 당시의 주류적인 개혁의 흐름을 형
정교분리(政敎分離)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4세기부터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16세기까지 교회와 국가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 간에 정권 탈취를 위한 암투가 그치지 않았다. 그 중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건으로는 신성 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그레고리 7세 교황이 머물고 있는 이탈리아 북부의 휴양지 카노사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었던, 소위 “카노사의 굴욕”사건(1077년)과 왕과 주교 간의 권력 투쟁을 그린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가 그 좋은 예이다.구교는 여전히 제정일치를 견지(堅持)하고 있으나, 프로테스탄트 교회(新敎)의 입장은 종교는 한 정권이나 국가와 흥망성쇠를 함께 할 수 없는 불변하는 영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국가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가 국교가 된다거나 어떤 정권이나 정당을 지지하고 나서면 언제인가 그 정권이 실권할 때 종교도 함께 쇠퇴하고 말 것이다. 불교를 국교처럼 섬기고 고승(高僧)들을 왕의 사부(師父)로 모시던 고려가 멸망하면서 불교가 당한 어려움과 기독교 신자들이 정부의 요직을 두루 차지했던 제1공화국이 무너지면서 기독교가 입은 도덕적 피해가 이를 증명해
민주주의의 핵심요소 중의 하나인‘다수결주의’의 단점을 논할 때 으레 등장하는 단어가 중우정치(ochlocracy, Mobocracy)라는 단어다. 다수의 어리석은 민중이 이끄는 정치라고 개념 지을 수 있다. 플라톤은 다수의 난폭한 민중들이 이끄는 정치라는 뜻으로‘폭민정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으로 부족한 다수의 빈민들이 이끄는 정치라는 뜻으로 ‘빈민정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플라톤은‘배의 비유’에서 선주, 선원, 키의 조종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선주’를 민주정체의 주인인 민중 ‘선원’은 민중 선동가인 현실정치인 ,‘키의 조종’은 나라의 경영을 의미한다.민중을 상징하는 ‘선주’를 “덩치나 힘에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보다 우월하지만, 약간 귀가 멀고 눈도 어두운 근시안이라, 항해와 관련한 다른 것들에 대해 아는 수준도 평범하다”라고 평가한다. 반면에 민중선동가를 포함한 현실정치인을 상징하는 ‘선원’은 “점잖은 선주를 최면제나 술 또는 그 밖의 다른 것으로 세뇌함으로써 판단이성을 마비시킨 다음,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이용해서 실질적으로 배를 지휘하는”존재들이라고 비판한다.그런데 항해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들은 선원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무관심 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궁금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겪는 시련과 환란을 겪는 삶에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그들의 삶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그렇다면 하나님은 신자들을 어떻게 도우시는가? 이 질문 앞에서 바울 사도는 자기의 자서전적 기록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도우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바울사도께서 로마 감옥에서 기록하신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놀라운 위로를 줍니다. 지금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과 법정을 오고 갑니다. 그의 죄명은“로마를 어지럽히는 폭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첫 번째 투옥생활에서 석방된 후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다시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이제 다시는 석방될 수 없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순교의 잔을 마셔야 되는 사실을 예감한 바울 사도께서는
그리고 중보와 동시에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자원봉사 및 교회의 자원들을 사용하도록 격려하고 실행하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더불어 교회는 기존의 경조부(慶弔部)에 더하여 시한부 환자를 돕기 위한 완화돌봄 사역부서를 만듦으로 효과적인 완화돌봄 사역을 할 수 있다.사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경우 임종을 눈 앞에 둔 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그렇게 낯설거나 불편한 사역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 평신도 사역자들의 경우, 제대로 완화돌봄에 대해 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을 경우, 말기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적절한 훈련 프로그램을 통하여 자원봉사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완화돌봄 사역팀은 규칙적으로 환자가 겪는 외로움, 소외감, 두려움, 우울감, 분노,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짐이 됨에 대한 부담 등의 영적 정서적 필요를 효과적으로 돕기위해 기초적인 경청 및 임종과 사별에 관련된 상담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이러한 교회의 완화돌봄 사역팀은 말기환자와 그 가족들을 위해 다양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자원봉사 사역자 중 의료관련 종사자들은 환자의 신체적 필요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다른
축도로 사용하는 고린도후서(13:13) 본문은, 알다시피 바울이 서신을 끝맺으면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복과 평안을 기원한 말이다.이것은 동사가 사용되지 않은 기원문으로서 직역하면“함께 하시기를”이다. 이 축도본문에서 바울은 아무에게 아무 것도 강권하거나 명령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본문으로 축도하는 목사들 중에는 마지막을‘지어다’하고 명령(지시)조로 끝맺는 이들이 종종 있다.그것은 아마 우리말성경에“있을 지어다”로 쓰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는 바와 같이 성경에는‘있을 지어다’가 본문보다 작은글자로 인쇄 되어있다. 이렇게 작은 글자로 인쇄된 낱말이나 짧은 구절은 원문에 없는 것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첨가한 것인데(창21:33‘아브라함,’요6:62‘ 어떻게 하겠느냐,’고후13:11‘ 말하노니,’갈1:4‘대속하기’등), ?개역한글판?성경을 개정하면서 고치지 않고 보존했기 때문에‘있을 지어다’로 남아 있는 것이다.축도는“, 예수그리스도의은혜와하나님의사랑과성령의교통하심이”[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구하는 것이므로 목사는 하나님 편에 서서 명령조로“함께 하실 지어다”하며 선포하거나 지시할것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함께 하시기를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