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문화와 더불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성 외에 지식으로 인도하는 다른 도구들에 관심을 가진다. 이를테면 감정, 경험, 그리고 은유와 같은 것들이다. 이성주의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의 현대인들은 어떤 사실이나 지식을 접할 때, 그것의 보편타당성이나 객관적인 기준을 배제하는 반면 시각적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방식으로 접촉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현대인의 욕구는 설교에서도 일방적인 선포보다는 이미지를 선호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이미지와 영상으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티 문화의 영향과 함께 현대 청중의 의식의 변화에서 오는 현상이다. 현대를 지칭하는 멀티미디어 시대는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한 정보전달 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조성하였다. 매체의 발달 과정에서 보여주듯이 지식과 정보의 전달은 단순히 듣는 과거의 방식에서 이미지와 영상을 통하여 보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현대 청중은 설교 역시도 단순히 말하고 듣는 통화 방식에서 이제는 이미지나 영상을 곁들인 전달 방식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모던 문화에 전면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저 연령층의 청중에게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전통설교 방식의 한계를 지
사사기 19~21장은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남색과 성폭행의 심각성과 그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사사시대는 대략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을 탈환한 때부터 엘리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성경은 이 무정부 시대를, “[그때에]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하고 묘사했다(삿21:25).그 시절, 에브라임 산골에 살던 어떤 레위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고 친정으로 도망친 첩을 찾아서 멀리 베들레헴까지 갔다. 그는 친정아버지 집에 숨어있는 첩을 발견하고 따뜻한 말로 달래서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를 했다. 그런데 사위가 길을 떠나려 하면 장인이 자꾸 붙들어서 레위 사람은 닷새를 더 머물렀다. 엿새째 되는 날도 장인이 해가 기울 때까지 붙들자 레위 사람은 장인을 뿌리치고 저녁 무렵에 첩과 하인을 데리고 나귀에 짐을 싣고 길을 떠났다. 그들이 가까운 여부스[예루살렘] 부근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베냐민 지파의 마을 기브아로 들어갔다. 그들은 마침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나 하룻밤을 유하려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날 밤에 마을 불량배들이 몰려와서 집주인에게,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 하리라”하고 위
지난 주 어떤 강의를 들으면서 “동안보다 동심을 유지하라”는 메시지가 참 마음에 꽂혔다. “동안도 동심에서 우러나와야 진정한 동안”이라는 말 또한 그러했다. 그러면서 그 강사가 회중에게 던진 동심이 살아있다는 증거 세 가지. “1. 계절의 변화에 여전히 민감하다면... 2. 다른 사람의 얘기에 잘 웃는다면…. 그리고 3.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면….” 이 말에 얼마나 많은 뉘우침이 있었는지 모른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동안의 얼굴과 피부를 갖고픈 소망은 너무나 강렬하다. 그래서인지 경기는 불황이어도 성형외과와 피부과만은 늘 호황이다. 우리나라 성형시장규모는 이미 5조원을 넘었다. 거기다 돈 쓰는 건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이에는 남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남자화장품의 시장규모도 벌써 1조300억원에 달했고 매년 10%이상 증가하고 있다. 그러니 이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누가 뭐랄 수 있을까? 나 역시 나이가 들어도 추해보이지 않고, 나이보다 젊게 보이면 기분 좋아하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동안’에 신경 쓰는 만큼, 더 중요한 ‘동심’을 깨우는 일도 얼마나 중요한가? 얼굴만 동안이면 뭐하나? 마음도 동심이어야지. 차라리 나이에 안 맞
그러므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고통의 의미에 대한 바른 성찰이 없이 고통을 피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자신들의 무지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안락사는 고통을 감소시킬 다른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취하는 극단적 해결 방법이다.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것은 고통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의미도 부정해 버리는 것이며, 고통과 더불어 삶의 가치까지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고통과 삶의 포기는 소중한 인간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다. IV. 성경적 반성과 입장 1. 죽음에 대한 올바르고 정확한 이해와 인식목회자에게 있어서 죽음 앞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인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 웨이브라이트(G. L. Waybright)는 3가지 인식을 강조했다. 첫째,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죽음에 직면하면 슬픔과 고통의 경험이 동일하다. 둘째,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죽음에 관한 많은 ‘왜 그런가의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셋째,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죽음에 직면해서 그들의 관심은 ‘현 세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다. 죽음은 인간의 적이
들어가는 말설교에 대한 변화의 요청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일찍이 20세기 초, 기독교는 설교와 함께 흥망을 같이 하였다고 말했던 포사이트(P. T. Forsythe)는 당시 설교에 대한 위기의식을 직시하며 만일 기독교에서 설교가 사라진다면 교회는 세상의 시녀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간파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설교에 대한 위기의식은 프레드 크레독(Fred Craddock)의 책, 「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이 발표되면서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혹자는 이러한 변화는 마치 설교학에 있어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바람은 학자들에 의해 신설교학(New Homiletics) 운동이라고 불려지기 시작했다. 신설교학자들은 신설교학 이전의 설교를 전통적 설교로 분류했다. 신설교학 관점에서 보는 전통적 설교는 설교자가 자신이 설정한 진리를 입증시켜 나가기 위해 연역적 논증 방식을 취한다. 일반적으로 명제 중심의 연역적 설교는 3개요(three point) 형식을 취하면서 설정된 명제를 설명하고 입증하며 설득의 작업을 펼쳐 나간다. 이와같은 방식을 크래독을 비롯한 신설교학자들은 청중을
창세기 18, 19장에는, 여호와께서 두 사자와 함께 마므레 상수리나무 숲에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가셔서 사라의 출산을 예고하고 소돔 고모라의 재앙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사실이 기록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고 죄악이 심히 무거워 직접 가서 확인하시겠다고 말했다(18:20~21). 아브라함은 롯과 죄 없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며 여호와께 매달려 소돔에 의인 50명, 45명, 30명, 20명, 10명이 있으면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18:22~33). 한편, 먼저 떠난 두 천사는 소돔성에 도착해서 마침 성문 앞에 앉아 있는 롯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잠자리에 들 무렵 소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집을 에워싸고, “오늘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하고 롯을 위협했다(19:5). 롯은 그들을 달래다가, 남자를 모르는 두 딸을 줄 터이니 대신 손님들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까지 간청했으나 무리들은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려고 했다. 그 때 천사들이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무리들의 눈을 멀게 했다. 천사들은 롯에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유야담’에 실린 논개에 관한 내용이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어 군사들은 패배했고 백성들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곱게 몸단장을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아래는 깊은 남강의 강물이었다. 왜적들이 그를 바라보고 침을 삼키면서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던 차,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논개가 미소를 띠고 그를 맞이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어내려 하였지만, 오히려 논개에 붙잡혀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사를 훈련할 때 그의 소실 논개는 의병 훈련을 뒷바라지했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에도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강가에 서서 술에 잔뜩 취한 왜장을 유인해 그를 끌어안고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 술에 취해 호기를 부리다 물고기의 밥이 되어 버린 불쌍한 인간, ‘게야무라 로쿠스케’. 잡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욥1:21) 4. 고통을 피하기 위한 선택안락사 옹호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생동안 남의 도움이 없이는 거동조차 할 수가 없고,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안락하게 죽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고통과 죽음의 연관 관계를 이야기하는 욥의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욥기 2:9에 보면 욥의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한다. 이는 더 이상의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욥은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과 같도다”(욥2:10)라고 일축하며 입술로 범죄 하지 않는다. 욥은 지속되는 악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 대해 신약은 욥의 인내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보라 우리가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5:11) 그렇다면 인간이 고통대신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지방회나 총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지역교회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참석하는 것이다. 개인자격으로 지방회나 총회에서 투표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곳들에서의 결정이 지역교회를 당연히 구속하지 않는다.한국침례교회의 경우 지방회나 총회 참석자를 “대의원”(Delegate)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명칭에는 “대표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지역교회의 자치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 남침례교에서는 “사신”(Messenger, 심부름꾼, 전달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역교회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참석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지방회나 총회의 결정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지역교회의 결정이다. 지방회와 총회는 지역교회를 향해 군림하거나 명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관 관계자들과 책임자들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평소에 필자는 지역교회들로 하여금 교회의 재산(건물과 대지 혹은 토지)을 총회에 가입하게 하고, 재산을 가입한 교회들의 목회자들에게만 피선거권 혹은 피임명권을 부여하고 있는 현행 침례교총회의 제도는 매우 침례교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역교회의 재산은 지역교회 회중의 것이며 성령님
동성애(homosexuality)는 동성 간의 애정 행위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 말에는 정신적으로 서로 의존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동성 간의 성관계(sex)를 의미한다. 남성간의 동성애자는 ‘호모섹슈얼리티’를 줄여서 ‘호모’(homo)라고 칭하고 여성 간의 동성애자는 ‘레즈비언’(lesbian)이라고 한다.‘레즈비언’은 그리스의 레스보스(Lesbos) 섬에 살던 여류 시인 사포(Sappho)가 동성애자였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성애자 뿐 아니라 짐승과의 변태적 성관계인 수간(獸姦) 까지 포함해서 광범위한 표현으로는 ‘소도미’(sodomy)가 사용된다. 알다시피 ‘소도미’는 구약성서시대 소돔[과 고모라]에서 성행하던 변태적이고 퇴폐적인 성관계를 통칭하는 말이다. 성(性)이란 부부 간에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인데 근래에는 이것이 공론화되어서 어떤 케이블 텔레비전에서는 미혼남녀들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앉아서 성행위를 대화의 주제로 삼아 서슴없이 이야기 하는 등 우리 사회가 너무 야(野)해 진 것 같다. 과거에는 동성애 등 부자연스러운 성관계는 감추거나 부인하고 부끄러워하던 것이 근래에는 ‘커밍아웃’(coming out)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하나님의 형상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엡4:24)이고, 다른 동물들의 특성을 능가하는 모든 특성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영적 형상, 이성적 형상, 도덕적 형상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한 모세언약의 하나인 제6계명은 하나님이 살인을 금지시키고 있음을 명백히 한다. 살인은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멸시킨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어떤 경우에도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절대적 명령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 예로 민수기35:16-21에는 고의로 살인한 자들을 죽일 것을 명령하고 있다. 출애굽기 21:12-14, 레위기 24:17-21, 신명기 19:4-13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 지니는 의도와 한계를 보여준다. 구약시대의 히브리인들에게 우연한 살인, 정당한 살인, 전쟁에서의 살인, 그리고 사형은 살인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Peter Saunders는 “제6계명은 비합법적인 살인이나, 고의 또는 적으로 행해지는 살인을 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비합법적인 살인을 금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죄 없는 사람을 고의적으로 적의를 가지고 죽이는 것을 중요한 범죄로 보신다. “거짓 일을
목사는 교인들을 자신의 양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양무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목사는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니, 하나님의 양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요 21:15-17). 2. 교회회원 개념한국교회와 한국침례교회에서는 교회회원 개념이 거의 없거나 희박한데, 민주적인 회중주의 정치가 교회 내에서 제대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교회회원”(Church Membership) 개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결코 교회당이 아니다. 교회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예전에 참여하고 교제를 나눈다고 해서 참석자들 모두가 교회는 아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에 대한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침례받은 신자들, 다시 말해서 중생한 자들을 교회회원으로 인정하는 원칙(Regenerate Church Membership)이 침례교회에서 세워져야 한다.교회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신앙고백에 근거한 침례를 받아야 한다(By Believer’s Baptism). 이미 다른 침례교회에서 그러한
나비 /손동연 시인 봄이찍어낸우표랍니다 꽃에게만 붙이는 우표랍니다 감자꽃 /권태웅 시인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파보나마나 하얀 감자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새 봄 /김지하 시인 벚꽃 지는 걸보니푸른 솔이 좋아푸른 솔 좋아하다보니벚꽃마저 좋아 그 꽃 /고은 시인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이 내 인생에 던진 의미는 뭘까? 얼마큼의 가치일까? 고난주간과 부활을 맞아 그 십자가를 다시 묵상해본다. 우선 내게 십자가는 확실히 ‘더하기’였다. 생긴 모양처럼 실제로도 그랬다. 내 어릴 적 삶의 곤고와 빈궁과 핍절함이 십자가를 만나면서 참 많이 더해졌다. 참 많이 풍성해졌다. 부요해지고 넉넉해졌다. 아무 것도 없던 내 어린 시절에 활기를 불어넣은 건 십자가였다. 내 마이너스 인생을 플러스 인생으로, 적자인생을 흑자인생으로 바꿔놓았다. 십자가를 몰랐다면 결단코 지금의 내 삶은 만나지 못했으리. 또 십자가는 ‘품’이었다. 지치고 화나고 억울하고 외롭고 좌절했던 나의 고3시절, 내 모(母)교회 지하기도실에 들어가 앉아 홀로 강단의 십자가를 바라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그 십자가는 정말 넉넉한 품이었다. 나를 충분히 안으시고도 남음이 있을만큼의 두 팔이셨다. 그날 안긴 그 십자가 품은 참으로 따뜻했다. 그 후로도 십자가의 자세는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열중쉬어가 없었다. 차렷도 없었다. 두 손을 소매 속에 마주 넣고 근엄하게 팔짱낀 모습 역시 없었다. 언제나 두 팔을 벌린 그 모습 그대로셨다. 또 십자가는 ‘다리’였다. ‘Rel
3. 한국적인 상황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 상황에서, 장로교회의 직분과 교회행정의 관행이 침례교회를 비롯하여 여타 교단들의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에는 직분에 있어서 엄청난 인플레이션 현상을 빚고 있다. 신약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직분들이 교단헌법에 규정되어 있고 또한 교회에서 공공연히 시용되고 있다. 성경에서 집사는 안수집사만을 의미하는 직분인데 서리집사 제도가 한국교회 전체에 만연하고 있다. 이는 목회와 교회행정에 있어서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인 목사들부터 성경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있지 않는 관행이다. 성경에도 없는 “서리집사”는 원칙적으로 1년 임기의 임시직분인데, 한번 서리집사로 임명받으면 그 직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평생 따라 붙게 된다. 또한 “권사”라는 직분도 서리집사 활동을 오랫 동안 한 여성도들에게 담임목사의 임명에 따라 부여하는 직분이다. 목회서신들에는 권사라는 직분이 언급된 적이 없다. 이렇게 목사-장로-안수집사-집사-성도, 권사-집사-성도 등의 직분명칭이 생기면서, 한국교회에서는 직분이 마치 계급과 명예의 상징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경이 말하는 직분은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