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때로 특별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성경에서 그런 예를 찾아서 인물, 그들이 처한 특별한 위치와 본문을 정리해보았다. 구약성경1.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나무 열매를 먹은 후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기 3:8~10).2.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 바로왕의 궁중을 떠나 광야로 갔다(히브리서 11:25).3. 브나야는 용감한 장수로서 눈 오는 날 함정[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를 잡았다(사무엘하23:20).4.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사자 굴에 갇혔으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다니엘 6:16).5.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치다가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요나1:17). 신약성경1.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 위를 걸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마태복음 14:29).2. 바울은 다메섹에서 이레다 왕의 고관이 함정에 빠뜨려 잡으려 했으나 바울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다(고린도후서 32~33).3.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다(누가복음 19:4).4. 빌립은 복
다른 한편으로 마태가 1:1에 아브라함의 이름을 위치 시켰다는 것은 이방인 구원을 염두에 둔 서사적 전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방인으로 출생했고, 구약 성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12:3; 18:18). 아브라함의 이름이 예수의 족보에 차용된 것은 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열국의 아비였음이 반영한 것이다. 마태복음 서사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문구가 이방인 수용을 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면서 이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표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마 3:8~9). 히브리어에서 “돌” 와 “자녀”와 비슷한 단어로 돌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녀를 의미하는 은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돌은 영적인 자녀로 열방을 향한 선교를 지향하려는 마태공동체의 정체성으로 볼 수도 있다. 마태가 예수의 족보에 아브라함을 위치시킨 것은 예수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신학적 의도가 함축됐으며, 이것은 메시아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구원할 열국의 아비로서 모든 민족을 축복한 아브라함의 사역을 이어받을 상속자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결과
겨울이 오면 고등학교 시절 국어를 가르치시던 선생님 댁에 가서 유성기(留聲機)를 돌리면서 듣던 “겨울 나그네” 생각이 난다. 이 가곡(歌曲)은 독일의 시인 빌헬름 뮐러가 쓴 스물네 편의 연작시를 슈베르트가 작곡한 것이다.안타깝게도 시를 쓴 뮐러는 슈베르트가 그의 시를 작곡한 1827년에 33세의 나이로 죽었고, 슈베르트 역시 바로 그 이듬해인 1828년에 불과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과 작곡가는 죽었으나 그들이 남긴 시와 음악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으니 참으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겠다. (히포크라테스)“겨울 나그네”는, 춥고 음산한 겨울을 정처 없이 떠도는 한 고독한 방랑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물 네 편의 시 중 다섯 번째 것이 일찍이 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보리수”이다. 4절로 구성된 시 중 1절은: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나는 그 그늘 아래 단 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의 말[들을] 새겨 놓고서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보리수나무는 석가모니가 그 아래에서 참선(參禪) 중에 도를 깨달았다 하여 유명해진 나무이기도 하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가신 마므레 상수리나무
기록에 의하면 1927년 종로에 ‘카카듀’와 ‘멕시코’ 다방이 문을 연 것이 우리나라 찻집의 효시라고 한다. 당시의 다방은 지식인과 문화 예술인의 집회 장소 역할을 하면서 “커피 끓이는 시대”를 열었다. 1950년, 한국동란에 참전한 미군과 유엔군이 인스턴트커피를 들여오면서 “커피 타는 시대”가 되더니, 1980년을 전후해서 다방이 커피숍과 카페로 탈바꿈 하면서 “커피 내리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1999년에 스타박스 체인점이 서울에 들어오면서부터 “커피”는 모든 차(茶)의 대명사가 됐다.커피를 포함해서 두세 가지의 차가 없는 집이 없을 터인데도 커피숍이 성행하는 것은 사람들이 카페를 찾는 이유가 단순히 차 마시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어떤 글에서 그 이유를 ‘차 30, 분위기 풀러스 알파 70퍼센트’라고 쓴 일이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노은동(老隱洞) 집 둘레에만 다섯 곳의 커피숍이 있다. 그 중에는 언제나 주인이 자리를 지키며 고객을 맞이하는 곳이 있는가하면 주인이 없는 때가 더 많은 곳도 있다. 또 같은 커피를 마시는 데도 어떤 날은 머그잔에 주고 어떤 날은 찻잔에 부어주는가 하면 갈 때마다 맛과 향이 다른 경우도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빈무덤 사건의 의미를 계속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그 다른 제자를 따라온 베드로의 행동을 묘사한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20:6~7).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라는 한글 번역은 저자가 이 문맥에서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잘 반영하지 못한다. 여기서 ‘따르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요한복음서에서 제자직과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애용되었다. 베드로가 “그를 따라 왔다”는 말은 단순히 그가 그 다른 제자보다 달리기에 뒤져서 늦게 무덤에 도착했다는 것보다는 그 다른 제자에 대한 베드로의 의존성을 가리킬 수 있다.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는 이제 십자가 곁에서 신앙의 중심을 지킨 그 다른 제자를 따라가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존재의 결말에 관한 인식에 있어서 그 다른 제자를 따르고 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신앙과 그 신앙의 체험에 있어서 베드로는 그 제자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20:8; 21:7).베드로는 무덤에 도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크리스마스 계절이 다가온다. 과거에는 성탄절이 가까워오면 교회와 거리와 상가에는 성탄을 알리는 트리와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었고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선물과 축하를 주고받으며 잔치 분위기를 이루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탄절이 가까이와도 거리에 트리가 보이지 않고 교회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없고 불빛마저 보이지 않는 곳이 많아졌다. 어린이와 학생들을 위한 성탄 전야 행사를 중단하는 교회가 많아지고 신자들도 성탄절을 잊은 것처럼 보인다. 한국보다 교세가 약한 나라들과 때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조차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바로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을 내다 걸며 법석을 떠는데 기독교 선진국인 한국 교회가 잠잠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성탄절이 이렇게 잠잠해 진 데는 여러 가지 구실(口實)이 있겠지만 그 중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 몇 가지가 있으니: 어떤 교파는 성탄절 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기념일을 인본주의의 산물이라면서 거부하고, 목회자들 가운데도 예수의 탄생 일시가 불확실한데 이교의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기념일의 사전적인 의미는 일어났던 일(사건) 자체를 기념하고 그
우리나라는 최근 삼사십 년 동안 경제와 과학기술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고 선조들의 문화유산도 비교적 잘 지켜내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 같다. 그런데 여전히 미진한 것은 공중도덕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갈 때마다 불쾌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 같다.필자의 느낌으로는 유쾌하고 마음 편한 모임은 교회뿐인 것 같다. 공중도덕 면에서 교회와 사회가 이렇게 엇갈려 나가는 것은 신자들의 높은 도덕의식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공화국에 안주하고 있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멀리 혹은 가까이, 집을 나갈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본다. 버스나 비행기가 종착역에 도착해서 모두 내릴 때는 앞자리에 앉은 이들부터 내리는 것이 당연한 순서임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우루루 일어나 먼저 앞으로 나간다. 외국인들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안 내리세요”하며 거두어서(?) 내린다.백화점이나 호텔 등 왕래가 빈번한 곳에서 문을 열고 나가려하면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할 것 없이 문 열고 서 있는 사람을 제치고 앞서 나가버린다. 무례하고 몰염치한 행위이지만, 생각해보면
필자는 지난 호부터 요한복음에서 제시된 부활현현의 체험과 그 속에 담긴 부활신학을 살펴보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도 부활현현 사건은 예수의 시신을 놓아두었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빈무덤 사건으로 시작한다.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과는 달리 여성 제자 막달라 마리아가 홀로 무덤을 방문하고 그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 후에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달려가서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말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0:2). 그녀가 ‘달려갔다’는 말은 직접 표현되지는 않은 그녀의 놀라는 감정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마태는 그 무덤을 방문했던 여자들이 예수의 부활에 관한 천사의 말을 듣고는 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말하기 위하여 ‘달려갔다’고 말한다(마 28:8). 그러나, 요한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한 상황에서 돌이 치워진 것을 발견한 그녀의 감정은 놀라움과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바로 찾아간 사람들은 시몬 베드로와 예수가 사랑하신 그 제자였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후에 여기서 다
단체나 국가가 잘 운영되려면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장(長)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장의 지도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지도자를 존중하고 따르는 구성원들의 태도이다. 장을 세워놓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협력을 거부하면 아무리 유능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 단체를 잘 이끌어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세계 어느 나라든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에게는 호 불호와 여야 간에 공석에서는 경의를 표함으로 지도자에 대한 예를 나타낸다. 전쟁 중인 두 나라의 대표가 회담을 할 때도 피차 격식에 따라 예를 다 한다. 자기 나라 장군이 회담 장소에서 적장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경의를 표했다고 해서 그것을 조국을 배반하고 적국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그런데 근래 우리의 영상 매체에는 국가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잊은 듯한 행위와 표현이 때때로 방영된다. 대통령이 투표소에서 한 자원봉사자에게 수고한다면서 손을 내밀었는데 그 자원 봉사자는 대통령의 선의의 악수를 무시하고 얼굴을 돌렸다. 누구든 대통령을 싫어하고 좋아하고를 떠나 국민으로서의 예의는 갖춰야 하는 것이다.우리
동방 박사가 방문한 베들레헴이 당시 사회에서 어느 지역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그들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를 보여주는 인종적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동방 박사에게 메시아 출생지역을 분명히 가르쳐준 사람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은 헤롯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마 2:7~8).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유다 베들레헴”(evn Bhqle,em th/j VIoudai,aj)은 신학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유대 지역의 작은 마을로 다윗이 출생하고 자라난 곳이다. 구약 시대 유대인들은 이곳을 다윗의 도시라고도 불렀다(삼상 16:1~13; 눅 2:4). 마태복음 서사는 예수를 다윗 왕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족보에서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한다. 이것은 다윗 왕조를 다시 회복할 구원자 메시아를 의미하는 칭호로 볼 수 있다(마 1:1). 그리고 두 소경은 자비를 구하기 위해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마 9:27). 그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부른 것은 예수가 메시아적 소명을 수행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태가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족보에 언급하고 출생지를 베들레헴(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피차 함부로 부르거나 불리어서는 안 된다. 살피건대 목사와 선생과 연예인과 정치인의 이름이 대게 가장 많이 불리어지는 이름인 것 같다. 연예인은 인기인, 정치인은 국가적 공인, 교육자는 만인이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필수 교육과정의 중심에 있는 신분이므로 그렇다 하더라도 목사의 이름이 함부로 불리어지는 것은 잘못된 기독교 문화를 반영하는 그림자인 것 같다.필자는 주일학교 학생으로부터 시작된 교회생활에서 잘 잘못 간에 목사의 신분이 능욕당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목사를 거명하면서 ‘목사’라는 직함까지 떼어버리고 ‘김00이가,’ ‘조00’이 하고 함부로 말하는가하면, ‘000 목사의 비리’ 등의 제목을 붙인 유인물을 만들어서 전국교회에 살포하고 신문이나 매스컴에 비방 기사를 내는 것도 보았다. 목사라고해서 어찌 과오 없이 한 생애를 살 수 있으랴. 때로는 넘치고 때로는 모자라고 작은 실수도 하고 큰 과오도 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사를 고발하는 유인물에는 작은 과오를 침소봉대하고 때로는 없는 혐의를 지어내기까지 하는 것도 보았다. 세상에는 목사의 이름으로 불리어지기에는 부끄러운 이도 있
둘째, 동방 박사를 이방인이라고 믿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태가 동방 박사를 베들레헴을 기준으로 동쪽에서 왔다고 묘사한 것을 근거로 그들이 이방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유대 동쪽에서부터 유럽 지역까지 폭넓게 흩어져 살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참고, Jewish War 2:398; 7:43). 이것은 동방 박사가 유대 땅 밖 동쪽에서 왔다고 해서 그들을 인종학적으로 반드시 이방인으로 볼 수는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게 만들었다.마태는 ‘동방으로부터’(avpo. avnatolw/n)라는 방향을 제시한 전치사 구를 사용했지만, 동방 박사가 온 곳을 알 수 있는 명확한 지명은 언급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마태가 언급한 동쪽을 바벨론, 아라비아, 이집트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동쪽은 아랍 유목민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됐는데, 그들은 그두라와 하갈의 후손으로서 팔레스타인 동쪽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구약 시대 동쪽은 시리아-아라비아 지역을 지칭한다. 초대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신약 시대 역시 동쪽을 시리아-아라비아 지역으로 지칭했다. 이것은 마태가 사용한 ‘동쪽’ 이라는 단어는 정확한 지
부사역자에게는 때로 담임목사(당회장)를 수행해서 외부에 나갈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필자의 경험을 되짚어 수행원이 지켜야할 몇 가지 상식을 정리해 본다. 1) 목적지 파악 : 담임목사나 내빈을 수행해서 외부 기관이나 단체를 방문 할 일이 생기면 수행 담당자는 웹사이트를 검색하거나 직접 문의해서 목적지와 오가는 도로를 조사해 둬야 한다. 아무 준비 없이 길을 떠나 목적지 부근에 가서, “어디로 가야 하지요?”하고 묻는 것은 점수로 치면 낙제점이다. 2) 주차장 확인 : 규모가 큰 집회에 갈 경우 주최 측 영접 담당자에게 차량 번호와 도착 예정시간 등을 알리고 차를 세울 주차장을 알아둬야 한다.3) 운전 중 통화 : 운전 중 전화는 금해야 하지만 업무상 필요한 경우 이어폰으로 받고 손 수신은 삼가야 한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자기 집 뒷마당에서 하듯 큰 소리로 통화하고 너털웃음을 웃어대면 누구든 두 번 다시 그에게 운전을 맡기거나 동행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4) 도착 후에 주의 할 일 : 목적지에 도착하면 모시고 온 분의 신분을 밝히고(필요시)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한다. 이 때 수행원이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임의로 자리를
우리 성도들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만, 목회자인 내게 주일은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날이다.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다. 정말 육감(六感)이 모두 만족하는 날이다. 육신의 고단함마저 영혼의 기쁨이 죄다 이겨버리는 날이다. 우선 주일은 ‘눈’이 즐거워 좋다. 오늘도 어디서들 그렇게 몰려오시는지, 늘 보는 모습이지만 또 신기하고 또 재밌다. 어느 새 예배당을 꽉 메운 성도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걸음이라고 평소보다 더 잘 차려입고 나온 성도들, 그들 손에 들려진 성경찬송, 그들의 경건한 기도, 그들의 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보노라면 그 어느 화려한 무대에 서있는 가수나 배우들의 기쁨이라도 이에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행복한 주일이다.또한 ‘귀’도 즐겁다. 오늘도 여전히 은혜롭고 아름다운 성가대와 찬양단의 찬양소리, 우렁찬 회중의 찬송소리가 교회당 담장을 넘는다. 흡사 교회 앞을 지나는 행인들의 마음까지 흔들 정도다. 물론 그 소리는 하나님의 귀에도 영광이 되리라. 그런가하면 교회학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선생님들이 말씀 가르치는 소리, 아이들이 따라하는 소리에도 영적생동감이 넘친다. 게다가 말씀의 한 문장 한 문장마다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들의 ‘아멘’소
초록이 논문은 마태복음의 동방 박사 경배 서사가 이방인을 마태공동체 구성원으로 수용하려는 신학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시도를 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 동방 박사 경배 서사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비평적 관점에서 새롭게 평가하고, 마태복음에 언급된 경배의 유형도 분석했다. 즉 마태복음에 묘사된 동방 박사는 이방인이라는 학설에, 본 단락의 서사 구조 분석을 확장 정리했고 동방 박사가 행한 경배의 유형에 담긴 신학적 의도를 고찰했다. 이 주장은 세 가지 관점에서 증명됐다. 첫째, 동방 박사가 인종학적으로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를 증명했다. 동방 박사의 이방인 정체성은 본 논문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둘째, 마태복음 1~2장이 이방인 수용을 위한 서사 플롯으로 구성됐음을 전제로, 마태는 이 단락에 이방인 수용의 당위성을 직간접적으로 배열시켰고, 예수 탄생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립적 반응을 통해 이방인 수용의 필요성을 더욱 심화시켰음을 관찰했다. 이러한 관찰은 마태복음 1~2장의 서사 구조가 이방인 동방 박사 경배를 통해 이방인 수용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돼야 함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에 나타난 다양한 경배 유형 분석을 통해 동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