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축복하라성경에는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하고 바로 왕을 축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47:10) 바로왕은 그 당시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지만 야곱이 바로에게 인사하러 가서 바로를 축복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 할지어다. 하라.”(눅10:5)고 했다.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평안이 그 집에 임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시면서 어느 집이든 가면 평안을 축복하라고 했다. 꿈이 이뤄지도록 말로 축복해야한다. 우리가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꿈을 축복하고 자신의 사업을 축복하고 자녀들의 꿈을 축복하고 주변 사람들의 꿈을 축복해야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4)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며
이제껏 다뤘던 경계선적 성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의 특징 중에 한 가지는 극단적인 완벽주의(perfectionism)이다. 완벽주의는 성격장애뿐 아니라 우울증과 불안증의 기저에 뿌리 깊게 자리하는 메커니즘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완벽하고 싶어하고 완전을 추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부족함 때문에 갈등하고 슬퍼한다. 불안해한다. 긍정적인 면을 본다면 완벽을 추구하는 경향 덕에 우리는 발전할 수 있고 일의 성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완벽주의의 성향이 너무 심해서 자신의 생활과 대인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면 다시 한 번 그 생각의 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B씨가 상담소를 찾은 것은 간신히 찾은 아르바이트에서 다시 해고되면서였다. 그는 이번에 시작한 직장에 나가면서 간단한 일부터 배워가기 시작했다. 상사가 주는 서류들을 복사하는 것을 포함해서 잔심부름을 하는 것도 주어진 일의 하나였다. 그런데 서류를 복사할 때, 그 서류들이 조금이라도 구겨져 있으면 신경이 곤두섰다. 구겨진 종이를 한 장씩 일일이 문질러 펴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간단한 일을 시켜서 너무 오랜 시
믿음의 말을 하라 세상의 모든 역사는 말로 이루어진다. 정치도 사업도 교육도 사랑도 전도도 꿈도 말을 하지 않고 되는 일은 없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긍정적인사고를 가지고 말을 해도 긍정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실패하는 사람은 대부분 부정적인사고를 가지고 말을 해도 부정적으로 말한다. 찰스캡스가 지은 “혀의 창조적 능력을 사용하라”는 책의 서두에 “당신이 입으로 내는 말은 당신을 성공케 하든지 아니면 당신을 속박할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을 성공과 풍성한 삶으로 이끌 수도 있고 자기 말에 얽혀서 피곤하고 고달픈 인생을 살수도 있다. 문제를 말하지 말고 희망을 말하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2) 하나님을 믿고 산을 향하여 바다로 옮겨지라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하는 말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이루어주실 줄 믿고 선포하는 말이 믿음의 말이요 믿음의 기도다. 사람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보고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새롭게 되는 장이다. 그런데 또 많은 사람들의 떠남을 겪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떠남의 이유가 직장이나 학교의 변화 등 좋은 일일 때도 많고 교회 안에서 누군가와 부딪치고 싫어지면 떠나기도 한다. 흔히 시험들었다고 한다. 상처받았다고도 한다. 누가 시험을 들게 하고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는 것인지는 늘 경계가 모호하고 항상 피해자만 있는 느낌이다. 교회는 만남과 은혜를 체험하는 하나님의 집이지만, 우리 모두의 부족함 때문에 상실과 분노를 경험하게 되는 아픔의 장이 되기도 한다. 더구나 이민 교회는 다른 곳에서는 수용과 인정, 사랑을 경험하기 힘든 외로운 사람들이 낯선 땅에서 새로운 가족을 찾고 싶어 모이는 곳이 된다. 그래서 사랑도 많이 하고 싸움도 많이 한다. 우리 모두의 가족이 그러하듯이. 미국에는 상담의 문화가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지고 뿌리 깊게 자리한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고 고민과 갈등으로 힘들어 하다보면 제3의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을 찾는다. 우리가 보기에는 별것도 아닌 문제로 상담실을 찾는다. 감기 때문에 의사를 찾듯이, 친구와 싸웠든지 혹은 청소가 하기 싫든지 사소한
크리스천의 영성인식은 이러한 ‘인간적 차원의 영성’을 넘어 ‘초월적 차원의 영성’을 포함한다. 초월적 영역 즉 초월자와의 인격적 관계와 그것의 우선성 및 중심성, 그리고 그것이 개인과 인간적 차원의 관계상황에 영향을 주는 ‘수직적 차원’(vertical dimension)의 영성적 ‘내용’을 통합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a living soul, KJV) 곧 몸과 마음이 살아나는 영적인 존재가 됐으며,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이중구조’안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됐다는 성경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다(창 2:7). 여기에서 ‘초월성’은 인간의 차원을 초월하지만 동시에 인간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 혹은 성령님과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이런 면에서 크리스천 영성은 상담심리학에서 주로 관심을 갖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성적 측면이나 기능을 부인하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영’(Spirit)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주와 연결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기능하며 살도록 만드셨다는 성경적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갈 4:6). 영성의 수평적 차원과
행해야 할 것과 안해야 할 것, 하나님의 길로 순종하는 것과 자기중심 혹은 자기욕심의 미혹에 따라 가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할 자유와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 모습의 실재를 나타낼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이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생의 전 발달 단계를 통해 이러한 기능을 발전시키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낼 책임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개인적인 삶이나 인간관계에서, 직장 동료와의 관계 등에서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서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연합하고 보완하며 반응하는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내재적인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인간은 단순히 신체적이거나 심리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죄와 자기중심적 욕망 및 그 추동(drive)에 의해 마음의 동기나 사고, 감정, 관계행위, 신체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상호적 영향을 교류하는 존재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서 성령님을 따라 영·혼·육의 상호작용 가운데 ‘생명의 길’(LifeWay)을 찾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지만 죄 가운데
11월에 추수감사절을 시작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접어드는 12월과 연말의 분위기는 우리를 한층 들뜨게 한다. 라디오에서는 크리스천 방송이든 아니든 연달아 캐럴이 흘러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들을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나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고자 하는 크리스마스가 극단적인 상업화에 이용되고 있다는 비판과 자각의 목소리가 일기도 하지만, 연말의 들뜬 분위기는 대부분 설렘과 기대를 동반한다. 가족모임, 선물, 송년회 등 각종 모임과 행사들로 정신없도록 분주하게 보내는 달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연말은 상담기관들도 비교적 조용해지는 때이기도 한다. 하지만 묘하게도 이런 공휴일의 앞과 뒤로는 더 심해진 우울증, 불안증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위기상담을 요하는 내담자들로 긴장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일명 Holiday Blues, 즉 명절과 휴일의 기간 동안 사람들이 우울증과 불안증 등의 정신적 문제에 시달리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기쁨으로 들뜬 축제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런 명절이나 공휴일이 정신적 증상들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UC Davis의 정신과 및 행동과 학부에 있는 Robert Bales 교수는 명절 우울증의 증상과 원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신체적이며 사고하고 느끼며 행동하시는 특성을 가진, 즉 신체·심리적 특성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한다. 이런 사실들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어느 정도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인간에 담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정의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건강한 신체와 기능 및 사고와 판단, 보다 성숙한 인품과 삶의 대처능력을 가진 사람은 더 하나님의 형상에 가깝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중요하면서도 핵심적인 세 번째 관점은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Spirit)이시기 때문에 인간도 ‘영’(spirit)을 가진 영적인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요 4:24; 고전 2:11).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다르고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며 교류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그리고 관계적인 존재로 창조됐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신체와 심리적 특성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다. 신체심리영적인 전인적 존재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지만 영혼과
근대 심리학 혹은 상담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몸과 마음의 안녕 및 관계의 문제를 포함한 영혼의 돌봄은 실질적으로 교회 혹은 신앙 공동체가 담당한 중요한 기능의 하나였다. 하지만 교회나 지도자들의 돌봄 혹은 상담이 교조적이고 경직된 인간이해 및 접근을 하는 경향을 보이고, 서양의 과학적 사고와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과거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인간이해와 돌봄의 축이 기독교적 관점과 접근으로부터 비기독교적 혹은 일반적인 관점과 접근으로 크게 이동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과학적 사고와 방법론으로 무장한 사람들 중에서 인간의 영적인 측면을 부인하거나 그러한 관점과 접근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자신들의 방식이 인간이해나 현상에 대해 더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다는 관점과 접근이 급속하게 확장됐다.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종교를 ‘약자들의 망상이나 도피처’처럼 봤으며, 그를 비롯한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죄에 대한 유대-기독교의 메시지가 각종 심리장애의 발발에 기여한다고 인식했다. 스키너(B. F. Skinner)와 같은 심리학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초월적인 것보다 관
얼마 전 운전을 하다가 교육방송의 한 라디오 DJ의 멘트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날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큰 집을 사서 자기 방을 가졌을 때라던가, 오래 바라던 큰 선물을 받았던 때가 아니었다. 나름 호사스런 여행을 갔던 기억도 아니고 뭔가 큰일을 이루어서 상을 받았던 순간도 아니다. 그녀는 가끔 언니와 자신을 데리고 나가 과자나 초콜릿 등을 사도록 허락해준 아빠와의 미니 데이트를 떠올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두 딸을 데리고 마켓에 가서 먹고 싶은 스낵들을 고르도록 해준 뒤에 주일마다 달달한 군것질을 실컷 하도록 허락해 주셨단다.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버지와 장을 보러갔던 그 특별한 기억들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것들은 엄청나게 큰 어떤 사건이나 소유물이 아니다. 눈부시게 찬란했던 것은 한 평범한 날의 햇살이나 뛰어 놀던 마당의 흙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환한 웃음이 유독 기분 좋았다거나 깔깔거리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에너지가 자신을 웃음 짓게 했던 기억들이다. 우리는 별 것도 아닌 줄 알았던 그 작은 일들을 생각하며 행복했던 순간으로 떠올린
근대 심리학 혹은 상담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들의 육신과 마음의 안녕 및 관계의 문제를 포함한 영혼의 돌봄은 실질적으로 교회 혹은 신앙 공동체가 담당한 중요한 기능의 하나였다. 하지만 과거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서구 교회나 지도자들의 돌봄 사역이 경직된 인간이해 및 권위적인 접근을 하는 경향을 보이는 사이에 과학적 사고와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인간이해와 돌봄의 축이 기독교적 관점과 접근으로부터 비기독교적 혹은 심리학적인 관점과 접근으로 크게 이동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 사고와 방법론으로 무장한 사람들 중에서 인간의 영적인 측면을 부인하거나 그러한 관점과 접근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자신들의 방식이 인간이해나 현상에 대해 더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기독교를 ‘약자들의 망상이나 도피처’처럼 보았으며, 그를 비롯한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죄에 대한 기독교의 메시지가 각종 심리장애의 발발에 기여한다고 인식한 바 있다. 스키너(B. F. Skinner)와 같은 심리학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초월
우리는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혹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의 한 가지가 상대의 혈액형을 가지고 성향을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얼마나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A형은 이런 성격이고, O형은 저런 성격이라는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우리는 위로받기도 한다. 적어도 상대가 특정한 행동을 하는 배경에 혈액형이라는 이유가 있다는 점 때문에 그 사람이 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러려니’하고 넘기게 되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도 사람들을 유형별로 분류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MBTI라든지 기질별, 성격별 구분 등 여러 가지 도구를 통해 사람들의 성향을 이해하고자 한다. 사람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지면서 상대나 나 자신을 이해하고 용납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지난 호에 소개한 분노 표출의 방식도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Harriet Lerner 박사가 구분한 5가지 분노 조절의 스타일은 내가 과연 어떻게 분노를 표현하고 조절하는가를 깨닫게 돕는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이해와 용납에만 머문다면, 건강하지 못한 감정표현의 패턴을 반복하고 살아갈 것이다. 나 자신의 상처, 분노의 뿌리를 알
인생길을 어떻게 걸어 갈 것인가?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저가 이루시고”(시37:5) 우리의 앞날을 여호와께 맡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생길을 마지막까지 완수해야 한다(행20:24). 인생길은 짧으나, 하나님은 그 길에 따라 각각 사명을 부여 하셨다.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인생길을 완수하는 것이 된다. 하루 한 page씩 글을 쓰면 10년이면 3650page의 대저술을 할 수 있다. 인생이 비록 짧으나 한 가지 일을 계속하면 죽기까지 대사업을 성취할 수가 있다. 지금 나는 세계 비전을 보며 태평양 한 섬, 사이판(Saipan)에 다문화 인종을 대상으로 선교 센터를 세우고 땅끝까지 복음전파의 사명을 걸고 있다. 주님께서 꼭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매일 매일 기도하고 있다. 인생길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 주를 만나봐야 한다. 인생길을 어떻게 걸었는지, 인생방향을 어디에 잡았는지 직고(直告)해야 한다. 무엇을 남겼는가? 도 중요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왔는가? 가 중요하며, 맡겨진 사명을 차근차근 잘 감당 했는가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돼야 한다. 인간이 공기 중에서 살고 있듯이 우리는
67년 전, 1950년 12월 22일, 흥남부두에는 여전히 배를 타지 못한 피난민 14000명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이미 유엔군은 모두 철수한 뒤였고, 뒤에는 중공군의 포격으로 불길이 치솟고 있다. 부두 앞 바다에는 기뢰가 가득했다. 이때 7600t급 메러디스 빅토리호 화물선 선장 레너드라루 선장은 부두의 피난민들을 탑승하기 시작했다. 화물칸은 물론, 덮개 없는 갑판까지 콩나물시루처럼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태웠다. 사나운 겨울 바다를 항해하여 무사히 남한으로 모두 다 탈출시켰다. 라루 선장은 피난민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봤다”고 회고한다. 그의 행동은 생명의 열매를 맺었다. 그 당시 화물선에 선원은 47명이었고 정상적으로는 추가로 12명 태울 공간에 화물칸과 갑판에 14000명을 태워 생명을 구했다. 그 작은 배에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다치지 않고 수많은 위험 속에서 그 일을 하였을까? “하나님이 직접 빅토리아호의 키를 잡고 있었다”고 했다. 그 후 선장은 이 때 받은 감동의 영향으로 일생을 수도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을 14000명 평안을 위해 미국 뉴저지 주 뉴턴 수도원에서 기도와 노동으로 보냈다. 당시 선원 로버트러리
결혼예비학교에서 “결혼의 사명”을 강의하다 보면 출산 문제가 등장한다. 가정사역자로서, 목사로서 다산(多産)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하다 보면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때가 종종 있다. 자녀를 키우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특히 자녀를 출산해 양육하는 일에는 부모가 개인적으로, 경제적으로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국가가 아이를 낳아서 양육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주면 자녀를 둘도, 셋도 낳아 양육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많은 젊은이들이 이제는 사회적 상황이 자녀를 양육하기에 벅찬 시대가 됐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그것은 우리들의 또 다른 욕심과 허영의 목소리가 아닐까?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불과 반세기 전의 우리 부모 세대는 개인적 여건이나 사회적 상황이 지금보다 결코 낫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부모 세대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든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녀를 많이 낳았다. 필자 역시 7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많은 자녀들이 비록 배고프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그 자녀들이 자라서 현재의 대한민국을 건설해 놓았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