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인생의 예상치 못한 축복 학개 2:1-9
[주일예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시리즈 12 산을 평지처럼 걸어라(하박국 3:17-19)
특별 계시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이 아닌 특별한 대상에게 일반 계시에서 얻을 수 없는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특별한 내용을 특별한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내신 진리를 의미한다. 특별 계시의 대상은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 백성으로서 구약 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멜기세덱과 욥)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이었으며 신약 시대에는 교회의 성도들이다. 특별 계시의 내용으로는 자연과 인간의 양심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분의 형벌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사함과 칭의, 성령의 중생과 내주하심, 교회와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것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그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들의 소원대로 아버지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만 가능하다(마 11: 27; 요 17:3, 6~8, 23~25).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힌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베드로의 인간적 통찰력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셨다(마 16:17).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성부와 완전
아래 그림은 정체되어 있고, 점점 쇠퇴해 가는 교회는 기존의 형식화와 제도화에서 벗어나, 2단계의 무브먼트의 동력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무브먼트로의 회복은 단순한 개선이나 보완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뿌리로부터 완전히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된다. 스티브 애디슨은 사역(Ministry)과 무브먼트(Movements)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역은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 목표를 이루는 것이라면, 무브먼트는 내가 누군가를 도와 그로 하여금 목표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고, 성령으로 돌아가고, 사명(Mission)으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코로나19가 시작되던 2020년, 북미에서는 그 전부터 계속 증가하던 문닫는 교회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게 됐다. 30만개의 교회 중에서 앞으로 18개월 이내에 6만개의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내다 봤고,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위기 속에서 교회가 점점 쇠퇴하고, 급기야 소멸되기 전에, 무브먼트를 회복해, 다시 부흥의 길을 가게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듯이, 무너진 성벽이 다시 회복되듯이 우리의 교회도 다시 회복되기
[주일예배] 살리는 영이 살아나게 한다 사무엘상 16:6~14
[주일예배] 삶으로 번역하는 성경 사도행전 2:43~47 조항철 목사(비전교회) 아래 영상을 클릭하면 새 창으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 3. 용기 있는 인생을 살아라 (학개 1:12~15)
[주일예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시리즈11 시험의 산을 옮기라(마6:13)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사의 회개 미국에서 1906년에 윌리엄 시무어에 의해 로스엔젤레스 아주사 거리(Azusa Street) 부흥집회에서 본격적으로 성령의 불길이 타올랐던 시기에, 한국은 1907년도에 평양에서 영적 대각성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였다. 불교와 샤머니즘의 뿌리 깊은 전통 가운데서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한국 땅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784년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서였다. 1866년 대원군 집권 당시에는 그 핍박이 극에 달해 약 8000명의 천주교 주교와 신부 그리고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다. 최초의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선교사들이 인천 항구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천주교가 들어온 지 약 100년이 지난 후였다. 1884년에 장로교 선교사인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나란히 한국 땅에 발을 디디게 됐다. 두 선교사는 모두 학생 자발운동 출신으로 같은 배를 타고 한국에 온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 선교사로서 이들보다 먼저 한국에 도착했으나 일찍이 순교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1865년에 영국 웨일즈에서
고대 교부 시대의 자연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이 천지창조를 시공간과 질서의 창조로 인식했기에 이전의 교부들에 비해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는 자연’에 집중했다. 물론 그의 자연 이해는 단순하지 않다. ‘삼위일체론’에서 한편으로, 그는 자연과 같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 사명을 다한 후 버려진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인간이 “선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연을 사용하거나 개발할 수 있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이 자연을 마구잡이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고백록’에서 인간의 원죄와 타락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이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당신을 멀리 떠나 당신을 대항해 스스로 교만해지려고 하는 모든 것은 당신을 잘못 모방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잘못 모방하는 그 행위에서 당신이 바로 모든 자연을 만드신 창조주시라는 것을 시인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든지 당신을 전혀 떠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또한 자연의 질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들의 하나님, 나는 천사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족, 친구, 학교, 일터, 취미 그룹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 관계의 그물망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의 근접 공간학 (Proxemics)의 개념에 의하면, 인간관계 물리적 심리적 거리의 네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1) 친밀적 공간(1~3명, Intimate Space), (2) 개인적 공간(8~12명, Personal Space), (3) 사회적 공간(20~50명, Social Space), (4) 공적 공간(50명 이상, Public Space). 과거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을 유지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이미 익숙해 있는 친밀의 공간과 개인의 공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친밀의 공간과 개인의 공간 안에만 머물지 말고, 사회적 공간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복음을 통해 하나님 중심의 의미 있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사역을 위한 핵심 그룹 혹은 창립 팀은 삶의 현장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내 교회로 데려오려는 시도보다는 그들의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고자 하는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신다. 지난 3년간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강타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14세기 중엽 코로나 바이러스와 흡사한 흑사병이 발생해서 유럽을 휩쓸었다. 얼마나 흑사병이 심하였는지 당시 유럽 인구의 1/3이상이 흑사병으로 죽었다. 이 흑사병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염병으로 기록되고 있다. 흑사병은 1347년 처음으로 발생했다. 그러더니 그 흑사병은 약 300여 년 간 주기적으로 발생하였다.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고 있는 그 때에, 독일 남쪽 바바리아 지방에 오버아마가우(Oberamagau)라는 외딴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 마을에서 살던 한 사람이 이웃 마을에 갔다가 흑사병에 감염되어 돌아왔다. 흑사병은 삽시간에 전체 마을로 번졌다.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께 흑사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희들을 죽음의 흑사병에서 구원해 주시면 앞으로 10년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는 연극을 만들어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 기도가 응답됐다. 기
가끔 인생의 마지막을 어떤 말로 끝낼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아마 화내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로 인생을 끝마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왕이면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하고 다시 만나자며 삶을 마치고 싶어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평소의 언어 습관이다. 왜냐하면 그 습관이 마지막 말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본문의 앞부분은 다윗 왕의 마지막 말이다. 다윗의 찬양 7절까지 이어진 다윗의 마지막 말은 찬양이었다. 단순한 유언이 아니라 마치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 같다.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1절), 다윗의 자신의 묘비명이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또는 자신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표현을 했다. 먼저 ‘이새의 아들’이라 한 것은 족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아버지가 이새, 지금의 자신은 ‘가문의 영광’이랄까? 별 볼 일 없던 존재, 미천한 존재였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다윗을 끔찍이 미워했던 사울 왕도 아들 요나단에게 “이놈아! 이새의 아들 다윗을 없애라! 그래야 네가 왕이 될 수 있어!” ‘이새의 아들’이라고 다윗을 낮춰 불렀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이
[주일예배] 관심을 가지세요! 출애굽기 7:1~7, 20~25 이미지를 클릭하면 설교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 살고도, 망하지 않으려면! 사무엘상 13:1, 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