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이다. 개척 3년차의 마지막을 향해가던 시점에 여기저기서 후원이 끊어진다는 편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3년이 그 주기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다시 어떻게 채우나 고민만 하다가는 교회와 내가 나이 한 살 더 먹겠다 싶어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고 편지도 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마음으로”라는 주제로 우리교단 국내선교회(회장 유지영 목사, KMB)에서 주관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됐다. 가끔 연락을 취하고 도움도 받고 얼굴도 익히던 사람들 즐비하고 국내선교회에서 제공하는 후원금에 대한 의리도 있어 한 번 참석 해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만난 제프 클락 교수와 J.D 페인 교수와 미남침례회 해외선교회(IMB) 설훈 선교사의 열정적인 강의 속에서 나름 뿌리교회의 자존심이라 여기던 계획들에 맛난 양념들을 접하게 되고, 국내선교회 유지영 회장님의 조율 속에 그 강사들, 또는 국내선교회 이사 목사님들의 꾸준한 멘토링을 경험하게 됐다. 멘토링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목회하는 현장 속에서, 말뿐이 아닌 그들을 자주보고 또 보고 계속 보고, 앞으로도 꾸준히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결과라면 결과였다. 아주 오래된 고집이 꺾이기는
절대적 지도력을 행사했던 모세가 죽은 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가 가나안 입국과 정착을 하는데 첫 번째 관문이었던 여리고 전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큰 전투였고 사건이었다. 그 여리고 전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돌고 또 도는 칠일간의 워킹 후에 제사장의 나팔 소리를 신호로 온 백성의 함성으로 그 성이 무너졌다는 기적이다. 그런데 여리고 전투에서 그것과 양극적으로 비교되는 또 다른 사건이 바로 아이성 패배의 사건이며, 이 패배의 원인이 바로 ‘아간’ ([עָכָן] 아칸-Akan 은 ‘괴롭히는 자, 근심이나 두통거리’를 의미한다).이라는 한 사람이 탐욕으로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되는 금덩이를 탐내어 자기의 소유로 감춘 것이었다. 이 아간의 사건은 그가 감춘 금, 은 시세의 가치나 아간의 목숨에 관한 문제보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완수해야 할 소명과 존재감이 개인의 사사로운 탐욕으로 인하여 좌절될 수 있다는 자각과 여운을 남긴다. 동시에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호흡처럼 붙어 다니는 소유욕에 대한 집착이
나는 가끔 명품과 명문가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때로는 교회 지체들이나 또 아내까지도 우리 목사님은 명품 좋아하고 명문가 좋아해라고 말할 때면 어의가 없어진다. 아무리 살펴봐도 내 소지품들은 그냥 평범하고 명품이라고 굳이 내세울 만한 것은 명함케이스 하나다. 평생에 명품이란걸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분명히 명품 애호가는 아니다. 물론 명품을 구입할 경제적 여력이 있지도 않고 명품을 구입하는데 돈을 쓰고 싶지않다. 그리고 나는 명문가 자식도 아니고 명문가가 되보려 한 적도 없다.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오해를 받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평소에 명품과 명문가 애찬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명품이란 무엇일까? 한 물건이 명품으로 인정받는 과정은 간단치가 않다. 이것은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구촌에 사는 어떤 민족도 이 물건에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을 소장해도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용도가 이와 같던지 비슷해도 언제나 비교 우위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물건을 명품이라고 할 때 공감이라는 필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어릴 때 어른들이
먼저 침례교단 농어촌선교회를 세우셔서 주의 크신 뜻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저희 농어촌선교회를 위해 기도와 물질 등으로 함께 해 주신 교단 내 모든 교회와 목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국교회가 한참 부흥하던 70·80년 대 그 부흥의 밑거름은 농어촌교회였습니다. 농어촌에서 나고 자라며 믿음을 가진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 교회들을 섬기며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탈농어촌 현상은 성장하는 도시교회들과는 반대로 농어촌교회들의 성장을 멈추게 했으며,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차고 넘쳤던 교회들은 원치 않는 빈자리만 넘쳐나게 됐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지금의 농어촌교회는 성장은 고사하고 목회자의 생계마저 고민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대부분의 초·중·고등학교가 폐교 혹은 축소되어 교회에서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며, 그나마 남아서 교회를 지키는 소수의 성도들은 대부분 천국을 앞둔 고령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어촌 목회자들은 소수의 성도들과 교회를 지키며 나름대로 교회를 다시 일으키려 몸부림을 치며 그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최선의 헌신을 다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오는 미자립의 현실과 어
우리의 미래는 다음 세대를 ‘다른 세대’가 아닌 ‘부흥의 세대’로 준비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다음세대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다음을 이어갈 새로운 주역이 되도록 준비시킬 수 있는가! 우리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고 변할 수 없고 변해서도 안 되는 것, 그것을 진리라고 한다.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 그의 말씀뿐이다. 이 말씀위에 우리의 다음세대를 건축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이 진리가 무미건조한 주지주의나 맹목적적 성경숭배나 율법주의적 맹신이 된다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진리가 살아서 생명이 되고 변화가 되고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에 실제적인 답이 되어야만, 다음세대가 살아날 뿐 아니라 승리하는 세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의 문제인 것이다. 진리와 생명을 종교와 전통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새술은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바로 생명과 진리, 전통과 종교의 문제이다.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가 다음세대를 살리고 세우는 일에 핵심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포스트모던이다, 4차산업 혁명이다, AI이다, 융합시대다 하는 미래의 문제들 속에서 길이 되고 답을 주는 승리하는 세대가 설 것이다. 요
다음세대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포스트모던의 세상을 지나 4차 산업혁명시대, 다가오는 AI세상의 시대를 살아갈 세대에게 본질을 준다는 것! 새 술이어서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그들에게 전통과 종교를 깨고 생명과 진리를 전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줄 것인가?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 생명과 진리, 전통과 종교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답을 찾을 것인가? 본질의 문제란 과연 무엇인가? 필자는 지난 글을 ‘우리는 새 술과 새 부대가 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으로 마무리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생명과 진리, 전통과 종교라는 측면에서 이제 과감히 전통과 종교화 된듯한 모습에서 돌이킬 준비가 되었는가? 우리에게 편하고 익숙하고 일부가 되어버린 어떤 요소들을 과감히 버리고 바꾸어 나갈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임과 동시에 “생명과 진리라는 전제를 배경으로 과감하게 새로워질 준비가 되었는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새 술과 새 부대가 될 준비가 되었는가? 한 번 더 생명과 진리, 전통과 종교를 명확히 짚고 가자!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여보 저거 임신한 것 같지 않아요?” 예배당 마당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아내가 놀란 듯 외친 말이다. 그 고양이는 동네 혼자 살고 있는 어느 할머니가 기르는 고양이인데 먹이가 부족한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시골인 이곳은 음식 찌꺼기를 두엄 칸에 버리거나 한 쪽에 구덩이를 파고 버리는데 교회 정원 한편에 있는 구덩이에도 자주 찾아오는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 눈에 부른 배가 보인 것이다. 마침 집에 유통기한이 조금 지난 연어 통조림이 몇 개 있었는데 그것을 주자는 말에 캔을 따서 주었더니 허겁지겁 먹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집에는 안 가고 마당 한 구석으로 가 퍼질러 누워버렸고 결국 연어 통조림을 먹는 며칠 동안 집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딸아이가 고양이 준다며 사료를 사왔고 고양이는 그것을 얻어먹으며 제 집인 양 현관 앞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고, 그 소문을 들은 주인 할머니는 목사님 댁에서 잘 얻어먹고 살라 하며 찾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택 뒤꼍에 있는 심야 보일러 저수통 근처에서 아주 작게 ‘낑’하는 소리가 들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보니 고양이 새끼 네 마리가 거기에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
다음 세대, 이 시대의 최고의 화두! 10/40 창(10/40 Window)을 주창한 선교 전문가 루이스 부쉬라는 학자는 최근에 4/14 창이란 신개념 선교지를 선포했다. 내용인즉, 4세에서 14세의 다음 세대를 잃으면 모든 미래는 끝이 난다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의 다음 세대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끝이 난다는 것에서 창안된 ‘신개념 선교지대’이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 세대를 잃어버린 서구 기독교, 그리고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지금 한국교회의 급격한 쇠퇴와 고령화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골 교회는 시골이라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았는 줄 안다. 그러나 도시의 교회를 가도 젊은이들은 거의 없고 고령화된 늙은 교회들이 대부분이다. 이번에 뱁티스트 트렌스포메이션(Baptist Transformation, 이하 BT)를 준비하면서 전국의 침례교회들의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도시나 농어촌을 막론하고 다음 세대, 특히 청년부가 존재하는 교회들이 지방회 안에서 1/3이 안됐고, 그나마도 제 기능을 발휘하는 청년부는 1/4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한국교회의 절반 이상이 주일학교를 운영하지 않는다는 보고는 우리가 이미 아는 상황이다. 대학
로마서 필사를 마치고, 성실히 완성케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필사를 끝마치며 감사 기도를 하던 중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필사를 마치면서 네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니? 어떤 마음으로 필사를 했니?”라는 음성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또 물으셨습니다. “필사를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서 했니, 칭찬 받고 싶어서 했니, 완성의 목적을 가지고 했니, 상 받고 싶어서 했니, 누구의 의를 위하여 했니?” 말씀을 대하는 저의 태도와 의도를 물으셨습니다. 나도 이것을 해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던, 일 중심적인 저를 발견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로마서 필사책을 폈습니다. 자세히 세세하게 다시 읽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님과의 친밀함을 구하며 묵상을 써내려갔습니다. 로마서를 자세히 읽으면 읽을수록 울컥 올라오는 감동의 말씀들은 살아서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서 필사를 하며 ‘비판과 비난’이라는 주제로 훈습일지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을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장단점을 구분하며 비판했던 저는 이 문제가 죽는 날까지 해결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사랑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롬14:15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
내일 일을 몰라 사람은 막말을 하면 안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언제부터인지 나의 입장이 그렇게 됐다. 나의 남편인 한명국 목사는 줄기차게 침례교세계연맹(BWA)에 몸바친 사람이고 그 덕분에 나는 가정과 교회에 대해 강하게 버텨가는 힘이 생겼다.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 왔는지 지나온 걸음을 되돌아 보니 아득하다. 어린 시절 집에 오면 따뜻한 어머니는 없고 서먹하고 썰렁한 선생님만 있었고 결혼을 해서 나이많은 남편에게 사랑받겠다고 선택은 했지만 남편은 없고, 목사님과 BWA만 있었던 것 같다. 언제 이 우리를 벗어나 볼까도 생각하고 이리저리 안간힘을 써봤지만 탈출하려는 나에게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은퇴하고 새로이 받은 교회는 다시금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전에 정말 나의 의지가 아닌 다른 의지로 전국사모회에 헌신하게 됐다. 스스로 나를 반문해보고 또 불가능이라는 두려움이 나의 영혼을 짖누르기도 했다. 안한다라는 말을 수 없이 내뱉었다. 그러나 어느날 개척 초기 성도 한 분의 전화가 걸려왔다. “사모님 무슨 일 하시지요? 기도 중이 하나님이 사모님께 물질을 보내라 합니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 길을 비켜갈 수 없는 길이라 여기고 순종하기로 한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