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 3학년 초쯤의 일이다. 어느 날 커피숍이었는지 식당이었는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옆자리에 앉은 내 또래의 대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 내용이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한 것 같은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용어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 흔히 쓰는 용어처럼 사용했기에 무슨 전문 학술용어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나는 내가 무식한 것처럼 느껴져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고등학생 시절까지 내 또래에서 나보다 책을 많이 읽은 것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물 안 개구리의 오만함이었지만 말이다. 그 때부터 나는 사회과학 전문서점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며 나는 내가 얼마나 세상에 대해 무지했는지를 알아 가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학대학에 진학한 뒤로 학교와 교회 생활이 전부이다시피 했기에 학교공부와 성경공부, 신앙서적 읽기 외에는 눈 돌릴 틈(?)이 없었다. 1학년 때 서양문화사 교수(외래강사)가 침신대 학생들은 책은 많이 읽는 것 같은데 너무 기독교 서적만 읽는 것 같다며 다양한 독서를 권했었지만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지
한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다. 졸업을 앞두고 학창시절을 그동안의 추억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어느 해 수학여행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한다. 저녁에 숙소에서 아이들이 잠옷으로 갈아입고 함께 재미있게 어울려 노는 자리에서 짓궂은 한 아이가 서있는 한 아이의 바지를 잡아 내렸다. 소위 깝질을 벗긴 것이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그만 이 아이는 보여주기 부끄러운 부분까지 보여주고 말았다. 그 순간 아이들을 박수를 치며 웃었고 어떤 아이들은 “찍어, 찍어”를 외쳤고 동작 빠른 아이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다. 바지가 벗겨진 아이는 수치감 때문에 울어버렸고 반 아이들은 우르르 찍은 사진을 보느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 일은 담임 선생님이 그 방으로 들어와서 장난을 친 아이가 울고 있는 아이에게 사과하게 하고 사건은 일단 마무리가 됐다.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장면을 상기시킨다. 그때 아이들이 “찍어, 찍어“를 외칠 때 큰 소리로 “안 돼 찍지 마라! 찍지 마라”라고 외친 두 아이가 있었다. 아이들이 찍힌 사진을 보려고 우르르 몰려들었을 때도 그 아이는 “지워, 빨리 지워”라고 외쳤다. 사과한 아이는 사과를 한 것이 아니다. 그 아이의 사과는 자신
2) 삼자 : 이정희 목사(부인 서영임)의 자녀들 자子: 이기대, 이기윤, 이기중 이정희 목사(대전온천지방회 주님의기쁨교회 원로목사)는 침례신학대학교 8대 총장(94년)을 역임했다. 이정희 목사의 장남과 차남은 각자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삼남 이기중 목사는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석사를, 미국 텍사스에 있는 서남침례신학대에서 목회학 박사를 받고 4대째 목사이다. 3) 이덕여 목사의 자녀들 그들은 다 충성스러운 교인들로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 집사로 봉직했다. 셋째 딸 이숙자 집사는 남매를 낳았고, 맏딸 남혜숙의 남편은 박영홍 목사인데 장로교회 목사로 봉직했고, 넷째 딸 이춘자 집사는 오남매를 낳았고, 장자인 성은창 목사가 있고, 현재 호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2. 이덕여 목사의 동생 이덕흥의 자녀들 자子: 이창희, 이창홍, 이경희, 이요섭. 여女: 이연희, 이복희 이덕흥 목사의 자녀들은 다 각자의 교회에서 충성스런 신자들이고, 장남 이창희 목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18대 총회장을 역임했고, 사남 이요섭 목사는 2017년도 교회진흥원 제4대 원장으로 취임해 봉사하고 있다. 두 딸들이 있는데 장녀 이연희 사모는 고 김선경 목사(칠산)의
이덕여 목사가 가장 좋아 하던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대는 모든 경우에 정신을 차려,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디모데후서4:5)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2:18~25) 이덕여 목사가 늘 사용하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의중백귀출(疑中百鬼出) : 즉 의심하면 백가지 귀신이 나돌아다닌다는 말씀이다. 이덕여 목사는 광시면 광시리 이장을 했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분쟁이 생기면 문제를 해결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 그때에 분쟁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서로 믿고 살아야지 그렇게 의심하면 없었던 일도 생겨 분쟁이 그치질 않는다고 타이르다시피 했다. 대인 관계에서도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쳐주는 교훈이 담긴 모습이었다. 사람이 두 주인 ‘재물과 하나님’을 못 섬긴다(마 6:24, 눅 16:13)
이 감노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놈들에게 빼앗김을 당한다 해도 우리의 신앙정신은 빼앗길 수 없다.”라는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신앙을 지키자고 외쳤다. 그리고 마을 사랑방에서 집안의 안방에서 신도들을 모아 주일을 지켰다. 1945년 8월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된 조국은 자유롭게 찬송을 부르고, 자유롭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고자 흩어진 교인들을 모으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원산사건은 다음과 같다. 일제(日帝)는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진주만 공격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그들은 교회의 공식집회 때에는 국민의례를 강요하고, 교회 안에서 국기배례, 황궁요배, 출정 장병의 무운장구를 위한 묵념, 황국신민서사를 외워 제창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일제는 이러한 전시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에 대하여 일제히 검거에 나서 불응자들은 본격적으로 투옥하였고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했다. 1942년 6월 10일에 원산의 헌병대는 교단총부를 불시 수색하는 동시에 이종근 감목을 검거 구속했다. 이들은 이 감목에게 동아기독교의 교규(敎規)에 명시된 몇 가지 사항에
나 혼자서 그 길을 가네 나 혼자서 가야 하네 누가 대신 가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가야 하네 나 혼자서 십자가 지네 나 혼자서 져야 하네 누가 대신 져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져야 하네 나 혼자서 죽어야 하네 나 혼자서 죽어야 하네 누가 대신 죽어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죽어야 하네 나 혼자서 심판대 서네 나 혼자서 서야 하네 누가 대신 서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서야 하네 시인은 1908년 평북 박천 출생으로 평양 서문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을 떠나 경도여전과 동경 가정학원 연구과를 수료했다. 이후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와 선천보성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일제의 신사참배의 맞서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후 도미해 노스웨스턴대학과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를 수학했고 김동명 목사와 결혼 후 LA한인교회를 개척하며 왕성한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1997년 10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대화회(오늘의 총회) 풍경 매년 개최되는 대화회는 교단의 큰 행사였다. 전도인 직분을 받은 교인들은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이들은 전도활동에 대한 체험담을 듣게 되고 또한 세워진 교회들에 대해서도 서로 간증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므로 대화회는 지금의 정기총회와는 사뭇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대화회에 참석하는 교인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더구나 대화회 기간에는 사경회도 함께 실시함으로 인해 모든 참석자들이 교회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며칠 동안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은혜에 빠지는 시간이었다. 회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임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 아름다운 친목의 시간도 됐으며, 개회 예배시 성만찬 예배를 드릴 때는 거룩하고 엄숙하며 감사함으로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이 많았다. 임원선거를 통해 새로운 임원들을 선출했는데 정말 모든 참가자들이 기도하는 심정으로 임원을 선출했다. 이때는 임원이 되는 것은 일제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아야만 감당할 수 있는 직책이었으므로 임원에 선출된 직분자들은 숙연한 자세로 받아들였다. 이덕여 목사의 인품 매년 한차례씩 개최되는 대화회(총회)에는 전도인 이상이면 모두 참석하는 교단의 큰 행사였는데 이덕
1938년까지 예산과 당진 그리고 천안 지역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다. 그 해 9월 원산에서 열린 대화회에서 감노(監老) 직분을 받았다. 교회로 돌아온 이 감노는 구역 내의 모든 교회를 돌며 전도에 박차를 가했다. 교인들은 이 감노의 말에 순종하여 열심히 전도했다. 이러한 전도를 통해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로 들어왔다. 전도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갖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마을에 들어가서 전도하려고 하면 마을 주민들이 농기구를 앞세우고 달려들면 빨리 피해야만 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유대인들에게 쫓겨 데살로니가로 도망을 갔지만 그곳에서도 꿋꿋하게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이 감노가 이끄는 전도대들은 쫓겨나는 일도 많았고, 두들겨 맞을 때도 많았지만 그러한 고난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고난을 극복하고 세운 교회들이기에 더없이 보람이 넘치고 감사가 넘쳤으며, 전도대원들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었다. 전도대원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국에 흩어진 교회에 다니며 간증을 함으로 다른 지역의 교회들도 전도에 힘을 얻고, 열심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됐다. 1942년 9월 4일 일제 탄압으
이덕여 성도는 역대에 부임한 교역자들을 잘 섬겨 끝까지 교회의 부흥과 안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1930년 10월에 이덕근 전도인은 통장 직분을 받고, 예산 구역에서 사무를 관장하였다. 제11대 노재천 목사가 1930년 9월에 사임을 하게 되자 다음 달인 10월에 제 12대 광시교회 교역자로 부임하게 됐다. 이미 사역을 하고 있었던 교회에서 담임목회자로 사역하게 된 이덕여 통장은 1934년 9월, 현 소재지(2018년 7월 현재,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광시길 12)에 자력으로 목조예배당 14평을 건축했다. 1943년 9월 일제의 탄압으로 예배당은 폐쇄를 당했다. 일제가 패망해 조국이 해방되자 다시 1949년 10월, 현 소재지(2018년 7월 현재) 교육관 위치에 목조 14평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1950년 12월 이덕여 전도사가 예산 구역 통장 직을 사임하고 전주 덕성교회로 부임했다. 108년 교회 역사의 맥을 이어가고 성장, 부흥하는 광시교회 광시교회는 제13대 유철주 전도사, 제14대 박경배 전도사, 제15대 이태진 집사, 제16대 이덕흥 목사, 제17대 방효태 전도사, 제18대 우제창 목사, 제19대 전석일 목사, 제20대 김상학 목사, 제21대
출생과 성장 그리고 신앙 이덕여(李德汝) 목사는 1899년 9월 7일에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 116번지에서 부친 이정회(개국開國466년<1857년> 4월 8일~대정12년<1923년> 8월 25일)와 모친 김정봉의 장남 이덕근(李德根)으로 태어났다. 본명인 이덕근 보다 이덕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덕근의 품성이 덕德을 베푸는 분으로 여겨져서 교단에서 자연스럽게 불리게 된 이름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덕근이라는 이름보다는 이덕여 목사로 부르게 된 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한문을 공부했으며, 부모는 그가 한학을 공부하여 관리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1912년부터 7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으며, 한문 공부를 끝내기 일 년 전인 1910년 마을을 방문한 전도인인 이후로 전도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했다. 그때가 1910년 6월이었다. 이덕근은 이후로 전도사의 전도를 받고, 1910년 6월에 전 가족이 동시에 믿기로 작정한 후 이 전도사의 자택에서 처음 모여 예배를 드리고 광시교회라고 명칭을 붙인 것이 계속 이 전도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전도에 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