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집은 골목과 접한 빌라를 끼고 들어가 그 빌라 뒤쪽에 있는 4층 빌라 중에 2층이다. 창문이 지면에 닿은 지층까지 합하면 3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안방과 옆의 건넛방 모두 창을 열면 앞집 벽만 보인다. 빛은 잘 안 들어오지만 다른 층 사람들의 목소리는 앞 집 벽에 반사되어 잘 들어온다. 여름날 저녁으로 향하는 오후에는 30도를 웃도는 정오의 더운 날씨가 조금 수그러져 대부분의 집들이 창문을 열어 놓는다. 아랫집 창문도 열려 있었고 어린 딸에게 야단치는 엄마 목소리는 확성기를 입에 댄 것처럼 쩌렁쩌렁 울린다. 거의 1시간 동안 들리는 높낮이 없는 일관성 있는 소프라노 소리에도 아이들 목소리는 들리지 아니했다. 그러나 엄마의 말에 의하면 아이가 엄마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는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뭐가 무서워, 학원 선생님이 무서워? 내가 더 무서워?…누가 학원에 가지 말라 했어?…80점이 뭐야? 왜 이렇게 공부를 안 해?” 이 아이는 어제 앞집의 담과 우리 빌라 사이에 깔개를 펴고 그늘진 좁은 공간에서 친구 두 명과 함께 뒹굴며 책을 펴 놓고 놀고 있었다. 아마도 공부와 숙제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책을 펴 놓았을지도 모른다. 어쨌
목회란 무엇일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행하는 사역을 목회라 한다. 전 세계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크고 작은 교회에서, 혹은 선교나 봉사직으로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저 “개념적 정의”일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심리학자로 알려진 프로이트와 더불어 무의식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낸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구스타프 칼 융은 아버지가 개신교 목회자였다. 자연이 아름다운 스위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평생을 목회자로 헌신한 융의 아버지는 어린 칼 융에게 종교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아버지가 죽음을 앞 둔 어느 날 융에게 그런 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융아!” “네! 아버지.” “너 목회가 무언지 아느냐?” “아버지 목회가 무업니까?” “목회라는 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목회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융의 아버지가 보기에 목회라는 것은 목회자가 사람의 수준을 벗어나서 완벽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많은 것을 바란다. 설교도 잘 해야 하고, 심방도 잘 해야 하며, 목사님이 기도하시면 다 응답을 받아야 하고, 상담도 행정도
심연희 사모 미국 RTP지구촌교회 학교폭력의 희생자로서 학교 일진의 분풀이 대상으로 이유도 모르고 내내 맞으며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냈던 한 개그맨의 간증을 접하게 됐다. 이렇게 맞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외로움, 그 폭력의 악순환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감을 토로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는지 모른다. 피해자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더불어 같은 나이의 어린 가해자들의 무지와 악함, 그 폭력을 대물림하고 잘못 지도했던 윗세대들, 눈에 뻔히 보이는 폭력을 방관했던 친구들과 어른들의 비겁함에 씁쓸하기만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말은 그의 부모님들이 했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맞을 만하니까 맞는 거라 하셨고, 어머니는 무조건 용서하라 하셨다. 크리스천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매번 멍과 피로 얼룩진 몸으로 집에 돌아올 때도 못난 아들을 낳은 당신 탓이라는 자책감으로 일관하셨다고 한다. 언뜻 보면 겸손하고 은혜가 많은 크리스천의 자세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문제를 들여다보지도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비겁과 나약함이 가려져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어른들 속에서 아이는 학대와 폭력을 마치 운명처럼 받
박종화 목사 빛과사랑교회 해리 티바웃(Harry Tiebout)은 굴종(순응:compliance)과 굴복(순복:surrender)을 구분해 중독된 자신이 중독을 부인하는 것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이해를 돕는다. 주로 어린 시절 가족의 역기능 체계에서 받은 상처로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정서중독이나 알코올, 또는 약물중독으로도 이어진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상호의존증(相互依存症)을 갖게 한다. 그러나 중독된 사람은 이러한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이 대단하다는 망상에 빠져 자기가 자신을 계속해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망가진 의지다. 역기능 체계 속에서 원래 자기가 주체로 자기를 잃고 자신보다 힘센 대상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기인해 갖게 된 죄책감과 수치심이 중독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나 자신은 중독을 부인하고 모든 것을 이겨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종교적으로든, 정서적이든, 약물이든 자기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중독의 특징이다. 중독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통제하려고 했던 삶의 여러 가지에 있어서 통제하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자기 스스로 이것을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적인 상담가로부터 자신의
새해가 되면 으레 세우는 계획이 있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기도를 더 많이 하며, 살을 빼거나 술, 담배를 끊거나 관계를 회복하거나 승진을 하거나 사업을 더 일으키고 싶다. 지난해 이맘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계획이다. 그런데 그때 마음먹었던 변화를 지속해 왔는가는 지난해를 지내며 쌓은 습관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밤에 간식을 찾는 습관은 복근을 위한 한해의 프로젝트를 금세 포기하게 한다. 쉴 때마다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습관은 새로운 것을 배워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미뤄두게 한다. 계속 ‘나중에 하지’를 반복하는 습관은 학업이나 일을 효과를 여지없이 떨어뜨리고 성공을 방해한 다. 비꼬거나 비난하는 말의 습관은 잘 지내보려던 관계들을 악화시킨다. 작은 일상이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이다.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서 찰스 두히그는 MIT의 한 연구를 소개한다. 뇌의 기저핵이 손상되어 기억할 수 없는 쥐들이 어떻게 미로에서 초콜릿을 찾아내는가를 지켜봤다. T자형 미로의 왼쪽 끝에 초콜릿을 놔뒀을 때, 한동안은 초콜릿을 찾지 못했고, 냄새를 따라 찾아 헤매는 동안 두뇌활동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수백 번 다니는 동안 쥐들은 왼쪽 오른쪽 길 중에
가족의 필수 요소는 결혼이다. 가족체계에 있어서 부모 자체가 서로 사랑하는 건강한 관계라면 가족체계는 순기능적이다. 아이들은 부모처럼 건강하고 자아경계선은 분명하며 잘 분화되어 성숙한 인격으로 자란다. 또한 자율적이고 책임감이 있으며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에너지는 건강한 배우자를 선택하는 안목이 된다. 결혼은 원하는 소유물처럼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결혼을 할 때 이상적인 부부가 된다. 그러면 그 부부는 자녀를 낳아 자신들과 같이 건강하게 아이들을 양육하기에 마치 유전자가 대물림이 되듯이 건강하고 기능적인 가족체계를 대를 이어 물려주게 된다. 건강하고 기능적인 부부란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고 스스로가 책임을 진다. 그들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할 때나 병 들었을 때나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한 몸 됨이요, 배우자가 바로 나이기에 그 무슨 조건이나 환경보다도 배우자가 생명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30대 초반의 한 젊은이가 있었다. 독신주의를 고집하다가 이제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결혼을 해야겠다고 한다. 현재는 취업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적성검사를 할 때에 그 질문들
가해자 배우자에 대한 피해자의 항변이다.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도 안 하며 여전히 가해를 하는데 어떻게 이를 참을 수 있단 말입니까?” 틀린 말이 아니다. 가해자 배우자의 가해 정도가 심해짐에 따라 피해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해자든 피해자든 부부가 모두 어린 시절 그들의 부모로부터 피해자였던 사실이다. 한 사람은 가해의 역할을 하고, 한 사람은 그림자로서의 피해자로 만나 새롭게 구성된 원가족을 통해도 계속 역기능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로 접근을 하면 안 된다. 적어도 하나님이 부부로 짝지어 주시고, 이미 자녀들이 있을 수도 있기에 서로의 상처를 보고 함께 치유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이혼에 대해 자신의 책임이 아니고 대부분 가해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가해자는 자신이 가해자임을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가해자라고 지목하기도 한다. 크거나 작거나 모두 피해자요, 가해자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단순히 역기능이 가족체계에 의하여 대를 이어 대물림이 되는 것에 귀를
결혼은 평생의 약속이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19:6). 하지만 구약(신24:1~4)은 이혼에 관한 말씀이 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발생 되는 일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지 못하여 인생이 저지르기 쉬운 죄에 대하여 그 부족한 부분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명기 24:1~4의 말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아내(여자)의 부정에 대한 말씀은 있는데 동등한 관계로써의 남편(남자)이 부정을 행하는 경우에 대해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의 부정에 대하여 아내의 고통은 묵과하라는 것이냐고 하면 거기에 대한 말씀이 없기에 일단 판단을 유보하는 편이 좋겠다. 그러나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는 것이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왔다는 것이고, 남편이 머리고 아내가 몸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이혼과 재혼이 허용되는지에 관한 논란은 주로 마태복음 5장 32절과 마태복음 19장 9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음행한 연고 외에”라는 말씀에 대한 다수의 성경 학자들의 해석은 ‘약혼’ 기간의 ‘음행’을 말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존재가 우리 모두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두려움이 일상을 지배했고 우리는 고립과 거리에 적응해야 했다. 사회구조, 경제구조,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구조까지 흔들리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힘들었던 한 해도 이제 저물어간다. 이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무엇을 흘려보내고 떠나보낼지 생각하게 된다. 한 해 한 해가 흘러서 지나가듯 우리의 삶에도 마무리되고 흘러가는 것들이 있다. 제발 코로나19 사태가 종결되기를 제일 먼저 기도하게 된다. 원치 않는 떠나 보냄도 있다. 한 살이라도 젊었던 날들이 소리 없이 흘러가고, 사랑했던 가족들, 친구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가슴 아픈 일도 있다. 교회 가족도 참 이상하게 연말이 되면 변동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이참에 섬기던 교회를 떠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때를 계기로 사역지를 옮기는 교역자도 있다. 고통이었던 경험들을 떠나보내고 싶기도 하고, 떠나보냄 자체가 고통이 되기도 한다. 우리 삶에 그만 떠나보내고 싶은 것들이 있다. 어두운 기억일 수도 있고 후회나 분노일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또 떠나보내고 싶은 것들 중 하나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힘든 관계이기도 하다. 어떤
현대 사회는 역기능으로 오염된 부분이 많다. 물질만능주의, 생명경시풍조, 인간의 이기로 발생하는 환경오염, 폭력과 전쟁 등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 만들어 내는 것들이 결국 인간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이렇듯 사회와 환경이 오염되면 그 안의 가족들도 역기능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사회가 오염되면 가족이 오염되고, 가족이 오염되면 사회가 오염된다. 사람이 오염되면 환경이 오염되고 환경이 오염되면 사람이 오염된다. 이처럼 이 모든 것이 상호작용을 하는 순환 관계로 볼때 인간과 사회, 그리고 환경을 한 생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많은 부모가 자신들은 건강한 부모, 또는 보편적인 부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대에 걸친 역기능 체계와 함께 오염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이 오염되어 있다고 직면하는 부모는 드물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아이를 양육함에 있어서 아이의 감정이나 자아경계선, 그리고 인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약육강식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공부라고 생각하여 공부를 시키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부모의 마땅한 의무요 책임으로 여긴다. 어떤 부모는 공부를 강요하는 것은 고사하고 직접적으로 아이에게 언어나 신체적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