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청년시절 군대에서 근무할 때다. 바로 위 고참 하나가 그렇게도 괴롭혀 너무 힘들고 어려워 각오를 하고 야간 근무를 마치고 모두 잠들어 있는 내무반에 들어가 군에서 사용하는 검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그 괴롭힘을 주던 고참 머리 위에 서서 검을 들어 '같이 죽자'라는 마음으로 손을 높이 들었다. 그 순간 그렇게도 괴롭히던 고참의 얼굴에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 손에 힘을 주면 새벽 네 시 반만 되시면 교회에 가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보여 포기해야 했다. 그러기를 세 번 정도 됐을까, 그러다 보니 제대하게 되었고, 지금 이 자리에까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그 옛날 분으로 글 하나 배우신 적이 없으셨지만 교회를 다니시며 성경을 읽으시고 찬송을 보시고 부르시는 모습에 형님들조차 “하나님이 계신지 잘 모르지만 우리 어머니 보니 계신 것이 확실하네.”고 하셨다. 절에 다니시다 예수님을 만나 교회에 다니시면서 한 겨울 새벽에 일어나 교회를 가실 때마다 찬물로 목욕하시고, 머리를 감으시고 가셨다. 신학교 학생시절이었지만 “어머님 그러다 큰일 나요. 감기 들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말씀드리면 “어찌 하나님께 가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 요한사도님께서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세가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입니다. 구약은 율법시대이며 신약은 은혜시대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할망정(롬3:20) 죄를 용서하거나 구원을 주지는 못합니다. 만약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있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겠습니다. 올 한 해를 살아갈 때에 우리는 무엇에 의해서 살 수 있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아니면 누구도 진정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오직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오직 은혜”가 진정한 고백입니다. “오직 예수 뿐이네”라는 찬양처럼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오직 예수, 오직 그분의 은혜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주님의 은혜이면 족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무엇이 더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주님의 은혜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나의 다 된 것은 다 주님의 은혜라”(고전15:10)고 고백하신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뿐이라고
먼 거리에서도 아름다운 이, 텅 빈 공간에서도 보이는 얼굴, 대답은 없으나 늘 들을 수 있고, 만질 순 없으나 늘 느껴지는 이, 눈 감으면 더 가까이 다가오는 이. 그는 누구일까? 읽는 이의 상상에 맡기며, 오늘은 아주 맘먹고 그에 대한 예찬이나 좀 해볼까 한다. 그는 오랜 세월에도 바래지 않는 빛이며, 지워지지 않는 글씨이다. 결코 오염되지 않는 순수, 결코 고갈되지 않는 자원, 결코 마르지 않는 샘, 가려지지 않는 영광, 결코 더러워지지 않는 의, 결코 깰 수 없는 평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안식, 결코 줄어들지 않는 기쁨, 결코 막히지 않는 지혜, 결코 상처나지 않는 아름다움, 결코 죽지 않는 생명, 결코 정복당하지 않는 요새,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이다. 그 무엇에도 당당하고, 그 어디에도 어울리며,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되는 이. 진정 그는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으며, 안 계신 곳이 없다. 모든 생명이 그에게서 났고, 모든 예술 또한 그에게서 났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의 사랑은 다 기록할 수 없고, 만 입이 내게 있어도 그 입 다 가지고 그가 베푸신 은총은 다 찬송할 수 없다. 그는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것보
Ⅵ. 목회자 독서의 필요성 목회자에게 독서는 바른 방향과 확실한 목표와 건전한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목회자로 시대적인 사명을 올바르게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적인 흐름을 읽어야 하듯, 시대적인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가 독서를 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따라서 많은 책임감과 함께 자원하는 마음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목회자는 책에서 자극을 받고 감동을 받으며 힘을 얻을 수 있는 위치에 그 누구보다도 앞서 있다. 책을 통해 발견하고 느끼는 지적 감동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을 동반한다. 책 하나 하나에 담겨있는 의미와 뜻을 헤아리고 알아가는 기쁨은 자연스럽게 독서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를 알게 한다. 1. 목회자 독서의 유익 목회자에게 유익한 것들은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에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면서 유익한 것들이 있다면 가장 먼저 교육이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교육을 통해 발전해야 한다. 일반적인 교육과 함께 목회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체계적이면서 전문적인 교육이 목회에
Ⅳ.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기독론적 측면의 구원 신약성경이 하나님 중심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많은 부분을 신약이 표현하지 않거나 매우 적게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약성경에 그리스도가 충만하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최고되심을 반박하거나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라는 의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기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창세전에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을 따라 되어진 것이다(고전 2:7, 8)라고 했다. 그리고 성도의 삶 안에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면, 현실은 예수는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부활하심 안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 시대가 시작됐으나 성도들의 승천적 부활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곧 “이미와 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기독론적 구원관이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설명되고 있다. “죽음과 부활,” “이미와 아직” 그리고 최종적 열매로서의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1. 십자가와 부활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실현된 갈라디아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관을 “이미와 아직” 그리
세상만사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융성할 때가 있으면 쇠퇴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역사는 기원 4세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때로부터 종교개혁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바로 전 세기인 14세기 말까지의 천년을 암흑시대라고 말한다. 서양 역사는 세속사와 교회사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의 암흑시대는 곧 서양역사의 암흑시대이다. 인류역사에는 대부분 좋은 일 다음에는 궂은 일이 기록됐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이와 같은 전철을 따랐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영웅적 활약을 앞세워 가나안땅을 되찾은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죽은 후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강한 지도자가 없어 사람마다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니 배교와 퇴폐, 무질서와 부도덕이 난무하는 시대를 불러오고 말았다. 역사는 히브리민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기원전 1,200년경부터 국가로 발돋움한 1,100년까지의 백여 년을 히브리민족의 암흑시대라고 말한다. 가나안 입성 때 추방하지 못한 이방 족속들이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섬겼지만 자기 종족의 수가 많아지고 히브리민족의 결속력이 떨어지자 곧 태도를 바꾸어 적으로 돌변했다. 그들의 반란과 침탈이 잦아지자 백성 중에 믿음과 용기를 가진 장수
“오늘도 부족한 인생이 한 영혼에게라도 축복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음전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주 10~12차례의 주중 정기 미팅을 소화하기 위해 집을 나설 때마다 반복해서 읊조리는 말이다. 이 읊조림을 통해 나는 절박한 이 땅 청년 선교 현장의 작은 분깃을 감당하는 자로서 스스로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확인한다. 현재 이 땅의 대학 캠퍼스는 전체 구성원 85%가 복음을 전혀 영접하지 않은 선교 대상지이다. 한국교회에 청년 선교 위기라는 말이 나온 지 20년이 다 되어 간다. 요즘 대학생들은 가급적 서로 종교이야기 안하는 것이 상식이다. 용기 내어 어쩌다 얘기를 꺼내면 “너 딴 세상 살아? 왠 종교질이야!”하는 따가운 눈총을 받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또 “프리 씽커즈”란 무신론 사상을 배경으로 한 동아리도 등장했다. 카이스트, 연세대, 고려대, 서울대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학습권 침해, 인권침해란 명분으로 이른바 “전도거부카드”란 것을 만들어서 배포한다. 이들은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기독학생들에게도 적극 대응하고 있는데 호응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요즘 대학 캠퍼스에서 노방 전도를 하는 모습은 결코 보기가 쉽지 않다. 전
Ⅴ. 목회자 독서의 현황과 문제점 1. 목회자 독서의 현황 지난 2009년 2월 19일(목)~28일(토)에 실시한 미래 목회사역을 준비하는 젊은 목회자 의식조사에서 제1회 젊은 목회자포럼 참석자 250명 중 설문조사 응답 124명에 의하면 실제적인 미래목회(사역) 준비를 위해서 ‘목회 분야 독서(44.0%)’나 ‘전문사역기관 활용(20.7%)’과 같은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들이 많았다. 이는 목회사역을 준비하는 젊은 목회자들의 의식이 건전하고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목회 분야 독서에 가장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책을 읽고 책에서 앞으로 펼쳐질 목회를 준비하겠다는 긍정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미래 목회사역을 준비하는 젊은 목회자일수록 물질, 인간관계, 학위 등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준비할 수 있을 텐데 목회 분야 독서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을 갖기에 충분하다. ‘독서’는 습관이다. 누가 시켜서 강제적으로 읽거나 의무감으로 읽는다면 독서는 고역이 될 뿐이다. 하지만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얘기가 다르다. 시대를 앞서가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책 읽는 것을 습관화해야 한다. 그리고 독서량을 늘리는 것과 동시
2) 종말론적 구원의 시제(갈5:5; 6:8) 종말론은 ‘마지막 때 일들을 다룬 교리’이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의 종말이 올 것을 믿으며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기대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핵심에는 종말론적 소망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임한 그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 유대교의 종말론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이 세대’를 극적으로 끝내고 ‘장차 올 세대’를 시작할 것에 대한 마지막 때와 관련된 기대이다. 이 세대 다음에는 죽은 자의 부활과 약속된 성령이 오심으로 ‘장차 올 세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구약과 유대교는 유일회적인 하루를 즉, 하나님의 땅 위에서 그의 통치권을 확립시키기 위해 행하실 주의 날을 기대했다. 종말론을 중심으로 바울신학 체계를 새롭게 구성된 게하르더스 보스는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시간이 두 세대가 중복되는 시간임을 말하고 교회는 2시간 사이에 존재한다고 했다. 옛 세대는 지나가고 새로운 세대의 세력들이 옛 세대 가운데 뚫고 들어왔다는 것이
2.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1) “부활”은 몇 가지가 있습니까? 2가지입니다. 썩지 않는 영광스런 몸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부활”과 지옥의 불과 유황 속에서 고통 가운데 죽지 않고 심판 받을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2)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생명의 부활은 하나님 뜻대로 선을 행하며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들이며, 심판의 부활은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마귀를 기쁘게 한 자들입니다. (3) 예수 믿으면 천국,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단정해 버린다면, 왜 굳이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천국 가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지옥 간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겠습니까? 믿음과 행함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믿음에는 반드시 믿음에 합당한 삶이 포함돼 있기 때문입니다. 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믿는다”는 단어의 헬라어 “피스튜오”는 예수님을 내 마음의 구주로 영접하면, 영접한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머물러 두게 하는 것이
베쯔는 갈라디아서 3장 8절에 있는 ‘아브라함의 복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석은 대개 “판타 타 에드네” 표현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이방인’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기서 “타 에드네”는 “이방인들”을 의미하고 “판타 타 에드네”는 “땅의 모든 족속”과 병행되는 “모든 민족”으로 해석돼야 한다. 사도 바울의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축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구약을 초월하고 있고 사도 바울 시대의 유대교를 벗어난 우리들은 아브라함으로 인해 모든 민족에게 확실하게 축복이 주어짐을 잘 알고 있다.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하심으로 인한 축복을 확인할 때,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도 이런 맥락에서 그 사실을 이해했다고 결론지었다. 즉 아브라함은 사실상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복음을 알고 있었다. 갈라디아서 3장 6~14절에서 바울은 한 번에 율법과 선지자를 5번이나 인용하면서 독점적으로 성경을 다뤘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똑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브라
“다방이다” 한글학교 학생들이 진도에서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한글백일장에 가는 차 안에서 한 분이 길가에 보이는 간판을 한 글자 한 글자 읽다가 소리치는 소리다. 늦게 글자를 배워 버스를 탈 때도 글자를 읽을 수 있어 좋고, 은행에 가도 내 이름을 내가 쓸 수 있어 좋다고 하시는 늦깎이 학생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진도에 있는 모든 한글학교 학생들이 모여 백일장을 펼치러 가는 자리다. 설레면서도 떨려 못 간다고 하시더니 막상 당일 아침에 머리에 염색도 하고 꼬까옷도 입고 나오셨다. 교회 승합차에 가득 모시고 소풍 가는 마음으로 달려가다가 창 밖에 보이는 글자들을 하나하나 읽다가 “다방”이라고 써진 글씨를 읽다가 흥분해서 소리치며 기뻐한 것이다. “다방, 저것이 다방이었네. 이제야 저곳이 뭐 하는 곳인지 알겠구먼.”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글자를 가르친다고 힘쓰던 보람을 느낀다. 이제는 문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학생으로 인정받게 된다. 전국적으로 여러 곳이 이미 실행하고 있지만, 진도도 내년부터 3년의 과정을 지나면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졸업장이 먼 소용이여?” “이제 그런 거 받아서 머에 써 먹을라고?”하시던 분들이다. 그도 그럴 것
바울 사도는 자기를 사랑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기가 담대하게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부탁을 하고 있습니다(엡6:19~20, 골4:3~4). 나도 동일하게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사망선고를 내릴 때 세 가지를 확인하는데 심장사, 호흡사, 뇌사가입니다. 이 세 가지 기능이 멎으면 죽었다고 판정을 내립니다. 심장이 뛰지 않고 호흡을 하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듯이 영적 호흡과 맥박인 기도가 멈추면 죽은 교회, 죽은 신앙이 됩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가산디지털 지역에 있는 가산중앙교회와 죽전에 있는 지구촌교회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두 교회 다 찬양과 기도가 살아있고 매우 강력한 교회였습니다. 공통점이 있었는데 두 교회 목사님들이 모두 신실하고 순수한 복음의 열정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두 교회의 성도들 또한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과 설교를 들은 다음에 뜨겁게 간절히 기도하는 영적인 갈망이 무척 높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집회를 인도하는 내내 나도 매우 행복했고 주의 성령께서 시간 시간마다 강력하게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은혜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요즘 많은 교인들이 세련된 순서와 프로그램을 즐기고 잘 준비된
나의 목회의 개척 떄의 모습을 보면, 잊을 수가 없는 가슴시린 시절의 모습, 3층 상가에서 매일 새벽과 밤에 강단 십자가 밑에서 창대한 목양의 꿈을 꾸면서 눈물의 기도를 주님께 드렸다. ‘ 주여! 꿈같은 목회의 길을 열어 주옵소서!’ 아파트 입구에서 어린이 전도를 하며 부흥하는 교육부를 그리면서 기도하며 전도했다. 눈물로 교회부흥을 그리며 기도하여 조그만 3층 상가에 예배당을 꿈같이 채워서 예배를 드렸다. 3층 상가건물에서 부르짖는 기도소리에 “시끄럽다”는 소리를 듣고 성전건축의 꿈을 키우며 기도하여 마침내, 그림과 같은 아담하고 조그만 성전을 건축하여 주님께 영광의 예배를 드렸다. 그 아담한 예배당에 성도들이 가득 찼다. 이제는 더 넓은 곳을 성전 터로 기도한지 몇 년 후에 더 광활한 꿈의 성전을 그리며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성전건축 도중 붕괴사고가 생겨 말할 수 없는 큰 시련 속에서 “회복의 그날”을 그리며 매일매일 눈물로 기도를 하였다. “이제는 이 불안전한 성전으로는 주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전기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벽체가 금이 가는 불안전한 속에, 주여! 기적의 그날을 주옵소서!” 결국은 주변의
필자는 지금까지 바울서신들을 토대로 사도 바울의 기독론적 교훈들을 살펴봤다. 이제는 요한복음을 토대로 사도 요한의 기독론적 교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 요한은 사도 바울 못지않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선명하고도 깊이 있는 많은 교훈들을 전달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관한 그의 복음서를 저술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존재성 곧 신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요한복음서를 저술했다. 그런 면에서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에 비해 여러 가지 점들에서 다른 국면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요한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국면은 바로 기독론적 국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록 표면적으로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의 존재로 사시면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지만, 동시에 그 분의 근본적인 존재성은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인 존재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의 관계성 속에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이란 가족 관계의 용어들을 계속적으로 수없이 많이 사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분명하게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