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의 경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를 대면하는 경험 곧 부활현현의 경험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다시 보게 하고 또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부활현현의 경험은 그들의 신앙과 사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정도로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복음서 기자들은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부활현현 사건들을 제시한다. 요한은 이것의 중요성을 더 크게 인식하고 제자들의 이 경험을 세 번에 걸친 사건으로 전달한다. 마리아의 경험이 개인적 사건인 반면, 제자들은 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가운데서 공동체적으로 부활현현을 경험한다.예수의 첫 번째 부활현현에 관한 요한의 보고는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일어난 것으로 제시된다. 요한은 먼저 제자들이 부활현현을 경험하던 때와 장소를 설명한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20:19). “이 날”은 예수의 부활의 빛이 죄와 죽음의 어두움을 물리치기 시작한 “그 날”이라는 종말론적 함축을 갖는다. “안식 후 첫 날”이라는
담배는 마야인들이 종교의식에서 사용하던 것을 남아메리카를 발견한(1492년) 콜럼부스가 선물로 받아 가서 스페인에 보급되었고, 다음 세기(16)에는 영국을 통해 유럽에 보급되면서 한 때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때(1590년) 보급되었고, 전 후 광해군이 일본에서 담배씨를 구입해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1602년). 담배의 형태는, 잎을 말아서 제조하는 여송연(呂宋煙, cigar)과 파이프에 넣어 피우는 ‘토바코’ (tobacco)와 우리가 ‘담배’라고 부르는 ‘궐련’(cigarette)이 주종이다. 담배의 해악1970년대에 발표된 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 청소년의 절반이 18세까지 거의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2013년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흡연자는 인구비례로 남성이 42.1%, 여성이 6.2%로 다른 나라에 비해 흡연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담배 속의 니코틴은 폐를 통해 혈액으로 흡수되어서 뇌의 도파민 계 신경을 자극해서 한시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하거나 각성을 촉진해서 불안감과 긴장을 이완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일시적 느낌일 뿐이며 흡연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에 빠져
‘엔하위키미러’에 실린 설명이다. 과거에 어린이들이 많이 사용하던 ‘동무’라는 단어는 ‘친구’의 의미로서 본래 한국 전역에서 쓰이던 말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공산혁명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의미변형을 시켰기 때문에 강한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해왔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동무라는 단어가 거의 죽은 말이 되다시피 하였고, 이 단어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춘천 파출소장 딸 살인사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오랜 세월 옥살이를 했던 정원섭 목사에 따르면, 1964년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교회 전도사로서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라는 현수막을 교회 앞에 내걸었다가, ‘동무’라는 말을 썼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온종일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적인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70년대에 제주도에 살던 고교교사 한 사람이 술에 취해 동무라는 말을 내뱉었다가 전기고문까지 당해서 정신병자가 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동무가 ‘친구’로 대체되었다. 순 한국말로 대체하고 싶을 때는 ‘벗’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만 ‘어깨동무’, ‘길동무’, ‘말동무’ 등과 같이 합성어로서는 자주 사용되고 있다. 문제 청소년이나
안락사의 분류는 그 생명체의 의사에 따라, 시행자의 행위 방법에 따라, 또 윤리적인 관점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생명체의 의사에 따라(1) 자의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 : 생명 주체의 자발적 의사에 따르는 안락사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다시 두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어떤 생명 주체의 명령, 의뢰 또는 신청 등의 적극적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뢰적 안락사라고 한다. 둘째, 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나 안락사를 승낙하여 이루어지는 경우, 즉 적극적인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의사에 의한 경우를 승인적 안락사라고 한다. 극심한 고통의 해결을 위해 의사에게 죽여 달라고 환자 스스로 요청한 후 이것을 의사가 받아들여 치사량의 주사약을 주입하여 죽게 하는 것으로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것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네델란드의 안락사 지침은 ‘당할 수 없을 만큼의 심한 통증이 있는 환자의 자발적 요청이 있고 죽음을 지속적으로 원할 때 주치의사가 동료의사들과 상의한 후 의학적 혹은 약리학적으로 정당한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2) 비자의적 안락사(Non-voluntary Eut
1. 영적인 지도자 직분과 평신도 지도자 직분침례교인들은 회중주의 정체를 실천한다고 해도 신약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교회의 공적인 직분들을 부인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목회자를 의미하는 영적인 지도자 직분과, 목회자가 말씀준비와 선포 그리고 기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봉사 구제 행정 재정관리 등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목회자를 돕는 평신도 지도자 직분이다. 신약성경에는 영적인 지도자를 목사, 장로,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다(행 20:28, 빌 1:1, 벧전 5:1~2). 사실 신약성경에서 “목사”(poimen)라는 명칭은 오늘날 사용되는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담임목사(Pastor)라는 개념과는 약간 달랐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양을 치며 보살피는 자,” 즉 “목자”(Shepherd)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된 말이었다(에베소서 4:11,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목회서신들에 의하면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 명칭은 장로와 감독이다. 장로는 유대적 배경이 강한 지역(팔레스타인, 알렉산드리아, 수리아, 소아시아 등)에서 사용된 영적인 지도자 명칭이었고, 감독은 희랍적인 배경이 강한 지역(빌립보, 데살로니가, 로마, 카르타고 등)에서 사용
신라 문화 유적의 명승지인 경주 관광지도에는 아흔 아홉 칸짜리 고택(古宅)이 한 채 들어 있다. 알다시피 그 집은 12대 400년 동안 만석꾼의 부를 이은 최 부자 가문의 사저(私邸)이다. 최씨 일가는 재산 뿐 아니라 사회적 기여 면에서도 모범을 보인 명문가로 알려졌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와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최 부자는 만석을 추수했으나 3천석만 곡간에 들이고 3천석은 구제에 쓰고 나머지 3천여 석은 나그네 접대에 사용했다고 한다.최씨 일가는 백리 안에 양식이 없어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는 가훈을 세울 만큼 사회적 책임감을 중시했으며, 흉년에는 땅이나 전답을 사지 않았고, 시집온 며느리들에게는 삼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고 살게 했으며, 찾아오는 나그네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독상을 차려주며 정성껏 접대했다.마지막까지 부를 지킨 것으로 알려진 최준 옹은 돈이나 양식을 꾸어주고 담보로 잡은 문서를 채무자들에게 돌려준 것으로도 잘 알려졌으며, 일본의 한반도 무단통치기간 동안은 만주의 독립군에게 꾸준히 자금을 조달했고 남은 재산은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계림대학] 설립에 헌납하고 스스로 “부자”의 짐을 내려놓은 인물
필자는 부활의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마지막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와 “내가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고 있다”는 말씀은 예수의 올리우심에 관한 요한의 독특한 신학을 반영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신학의 출발점과 중심점으로 삼았던 사도 바울은 부활과 올리우심을 구분하지 않았다. 예수의 부활은 곧 하나님의 영광에로의 올리우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 2:9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관한 언급 후에 바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곧 그의 올리우심이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 부활 신학이 발전함에 따라, 부활과 올리우심(승귀 혹은 승천)을 구분하는 경향이 새로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누가는 그런 신학의 대변자였다. 누가에 따르면, 부활의 예수는 승천하기 전 사십 일 동안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활동한 후에(행 1:3), 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한 것으로 제시된다(행 1:9; cf. 눅 24:51).요한은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부활과 승천을 구분한 누가의 신학을 존중하면서도 그보다 한
한 주간을 시작하는 아침, 어김없이 이번 주도 내 스마트폰에 입력된 ‘해야 할 일 목록’(To Do List)들이 나를 채근한다. 교회 목회에서 꼭 해야 할 설교와 심방, 상담과 회의는 물론이고, 외부 설교와 강의 스케줄까지 내 마음을 분주히 일으키고 있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언제부터 내가 이런 해야 할 일들에만 나를 맞춰놓고 나를 끊임없이 몰아붙이게 되었을까? 바쁘다는 것이 자랑인가? 바쁘다는 게 유세(遊說)인가? 그래야만 내 존재감이 확인되는가? 그래서 오늘은 잠시나마 그 모든 것들 앞에서 내 걸음을 멈춰본다. 물론 해야 할 일 많고, 가야할 곳 많고, 부르는 곳도 많은 목회자. 기쁘고 행복한 일이다. 날 알아주는 이들 앞에 서는 일에는 묘한 희열과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그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날 흥분시키는 매력적인 것들, 그것이 날 넘어지게 하는 유혹도 될 수 있음을 왜 난 자꾸 잊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하나님 만나는 시간보다 사람 만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져버린 목회자.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보다 사람 앞에 서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져버린 목회자. 내공을 쌓는(In-Put) 시간보다 밖으로 토해내는(Out-Put) 시간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죽어야 하며 품위를 갖춘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더욱이 극심한 고통으로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마저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생명윤리 문제를 다루는 성직자와 학자들은 ‘비록 극심한 고통이 있더라도 환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자신의 실존적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온전한 자유와 책임감을 함께 갖춘 온전한 의식으로 죽음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현대의학의 완화의료기술은 극심한 통증을 조절,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면서 과거에는 생각할 필요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 현실화되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본 연구의 주제인 안락사와 관계해서도 인간의 힘으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막는 일이 발생하고, 이미 사회문제화 되어 각 나라마다 법제화 되어 가고 있다. 안락사 법안을 최초로 통과시킨 국가는 네덜란드로서 2000년11월28일 네덜란드 의회를 통과하였고, 이를 계기로 전 국가로 논쟁이 유발되었다. 이러한 시점에 안락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시각이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한 시기라고 본다. I
특히 침례교인들은 교회들의 연합이나 모임을 또다른 교회로 여기지 않는다. 교제와 협력을 위하여 지방회와 총회가 있지만, 그것들은 참석자 개인들의 모임이지 그 자체가 교회는 아니다. 큰 지역교회가 작은 지역교회나 농촌교회를 도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 간의 관계는 종속적이지 않고 상호 독립적이다. 침례교 목사요 교회행정 전문가인 에드워드 히스칵스(Edward T. Hiscox)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이미 언급했듯이 각각의 독특하고 개별적인 교회(each particular individual church)는 모든 교회적인 권리들과 특권들과 책임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실제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독립적이다(actually and absolutely independent). 다른 모든 교회들과 개인들과 사람들의 단체들도 역시 독립적이다.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입법자가 되신다.또한 침례교인들은 각 지역교회는 자치권(자율권, Autonomy)을 갖는다고 믿는다. 지역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서 “스스로”(Auto) “규범”(Norm)이 된다. 각 지역교회는 “스스로 통치하는 유기체”(Self-governing Organism)이다. 지역교회 이외의
안락사의 분류는 그 생명체의 의사에 따라, 시행자의 행위 방법에 따라, 또 윤리적인 관점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생명체의 의사에 따라(1) 자의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 생명 주체의 자발적 의사에 따르는 안락사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다시 두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어떤 생명 주체의 명령, 의뢰 또는 신청 등의 적극적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뢰적 안락사라고 한다. 둘째, 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나 안락사를 승낙하여 이루어지는 경우, 즉 적극적인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의사에 의한 경우를 승인적 안락사라고 한다. 극심한 고통의 해결을 위해 의사에게 죽여 달라고 환자 스스로 요청한 후 이것을 의사가 받아들여 치사량의 주사약을 주입하여 죽게 하는 것으로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것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네델란드의 안락사 지침은 ‘당할 수 없을 만큼의 심한 통증이 있는 환자의 자발적 요청이 있고 죽음을 지속적으로 원할 때 주치의사가 동료의사들과 상의한 후 의학적 혹은 약리학적으로 정당한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2) 비자의적 안락사(Non-voluntary Euth
베란다 한 구석에 놓여 있던 군자란이 겨울을 이겨내고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옹색한 가운데서도 온도와 햇빛과 영양분이 균형을 유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 역시 온전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양과 지식과 건강이 균형을 유지해야한다. 어떤 사람은 몸은 건강한데 의지력이 약해서 언제나 시작한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지식은 많은데 판단력이 약해서 평생 남의 말만 듣고 남의 주장만 따른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의지가 너무 강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 독선적인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모두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목회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교에 힘을 다하는 교회가 있는가하면 구제와 사회참여에 힘을 기울이는 교회가 있고, 성경공부에 힘을 쏟는 교회가 있는가하면 기도와 집회에 전력을 다하는 교회가 있다. 어느 것도 좋다 나쁘다 하거나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므로” 은사대로 목회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교회의 기본적 기능인 예배와 전도와 교육과 봉사의 균형을 잃지 않으면 될 것이다. 만약 교회가 주어진 여러 기능을 조화롭게 실천하지 못하고 선교에만 치중(쏠림)하다가는 교회가 아닌 선
필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개인적으로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천사들의 등장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부활하신 예수와 마리아 사이의 대화를 제시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20:15).예수는, 천사들이 했던 것과 같이, 부활의 소식을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마리아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예수의 존재의 결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예수는 두 개의 질문을 던진다: 첫째는 천사들이 했던 질문의 연속으로서 “네가 어찌하여 우느냐”는 것이며 둘째는 그를 따라온 첫 제자들에게 한 것으로서 “네가 누구를 찾느냐”는 것이다(1:38). 첫째 질문은 마리아로 하여금 그녀의 현재의 부정적인 심리 상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그녀가 슬퍼하고 아파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예수는 마리아를 죽음과 슬픔의 과거로부터 이끌어내는 선한 목자로서 그녀에게 접근한다. 둘째 질문은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로서 부활하신 주님과의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죽어야 하며 품위를 갖춘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더욱이 극심한 고통으로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마저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생명윤리 문제를 다루는 성직자와 학자들은 ‘비록 극심한 고통이 있더라도 환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자신의 실존적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온전한 자유와 책임감을 함께 갖춘 온전한 의식으로 죽음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현대의학의 완화의료기술은 극심한 통증을 조절,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면서 과거에는 생각할 필요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 현실화되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본 연구의 주제인 안락사와 관계해서도 인간의 힘으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막는 일이 발생하고, 이미 사회문제화 되어 각 나라마다 법제화 되어 가고 있다. 안락사 법안을 최초로 통과시킨 국가는 네덜란드로서 2000년11월28일 네덜란드 의회를 통과하였고, 이를 계기로 전 국가로 논쟁이 유발되었다. 이러한 시점에 안락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시각이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한 시기라고 본다. II
따라서 침례교인들은 “대리종교”(proxy religion, 대표적인 예로 유아세례, 고해성사, 국가권력에의 의존, 목회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신앙 등이 있다)를 배격한다.침례교인들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믿지 않을 능력,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종교문제에 있어서의 영혼의 유능성”(Soul Competence in Religion)이라고 한다. 자유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대로” 창조하신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믿는다. 비록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 자유의지가 부패하기는 했지만, 성령의 감동하심과 역사하심이 있을 때 인간은 마음문을 열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요 주님으로 영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혼의 유능성(역량)은 인간이 획득해 낸 능력(a human achievemant)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능력(an endowment from God)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a gift from God)인 것이다. 1963년판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Baptist Faith and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