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게임기의 부활, 23년 만에 부활한 ‘공중보건장학제도’ 대량 미달! 세상 사람들도 부활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뭔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실체는 모르고 결과만 가져다 쓰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찬양한다. 주님과 함께 일으켜 세워진 우리는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간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갱이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정 성경적인 부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진짜 금요일에 돌아가셨는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Good Friday)에 죽으시고 ‘부활절’ 주일 이른 아침에 죽음에서 일어나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보통 토요일) 전날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금요일에 죽으신 것으로 믿고 있다. 아니다. 예수님은 수요일 날 돌아가셨다. 그분께서 죽으신 다음 날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정규 안식일 즉 토요일의 안식일이 아니었다. 그 날은 매년 한 번 있는 안식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기 때문이다(요 19:31). 이러한 큰 안식일은 한 주의 어떤 요일이라도 될 수 있으며 그 해에는 분명히 목요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비일(수요일)에 십자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은 크게 3세대로 구분되어 있다. 오늘의 사회가 있기까지 과거에 수고하고 땀 흘리는 세대로 ‘공경과 섬김’의 대상인 1세대와 2세대는 지금 우리 사회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세대로 ‘격려와 협조’의 대상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책임을 지며 땀 흘릴 제3세대는 ‘투자와 양육’의 대상인 것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이 3세대가 한데 어울려서 서로 공경, 격려와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함께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계층, 학력, 연령, 이념, 지역별로 나라는 사분오열로 갈가리 찢어져 있다. 사회 통합을 앞장서서 견인해야 할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따라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거나 심지어는 즐기고 있다. 그 결과 남북분단보다 남남분열을 더 우려하는 목소리가 비등해져가고 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교단과 교회는 함께하는 공생(共生)의 몫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 대답은 “아니요”이다.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반목과 대립 분열의 내홍을 겪지 않는 교회와 교단이 드물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부여받은 교회 내에서조차 함께하는 삶을 이루어가지 못한다면 교회 밖에서 공
조국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아름다운 전통은 존중하고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통이 전혀 성경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진리가 전통이 될 수 있지만, 전통이라고 해서 항상 진리는 아니다. 많은 교회에서 사순절이 시작됐다. 사순절이 성경에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순절(Lent)은 성경에 없다. 그렇다면 사순절(四旬節)은 사람의 전통이요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 불과하다(골2:8).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받았던 고난을 생각하며 기도와 절제의 삶을 산다는 사순절! 사순절을 지내는 그 신앙과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없는 이교도의 절기를 지킬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사순절은 어디서 왔는가 사순절(四旬節)은 부활절 이전 40일을 금욕하며 지내는 절기를 말한다. 사순절은 주일 6번을 빼고 계산하기에 실제로는 46일 간이다. 특별히 사순절 절기가 시작되는 날은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이라 불린다. 2019년 올해 사순절은 부활절(Easter)이 시작되기 전인, 3월 6일부터 4월 20일(부활절 이브)까지다. A.D. 325년 니케아공의회(council of Nicea)에서
새해가 됐지만 우리 사회와 교회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도리어 이전보다 더 못한 상황으로 흐르는 듯한 모양새다. 세계 또한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밝은 전망보다는 이전보다 못한 전망들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미중의 G2 및 무역전쟁에서의 주도권 싸움은 점입가경이다. 럭비공같이 예측할 수 없는 트럼프의 언행에 전 세계는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s)를 타고 있고, 증시 등 경제는 출렁거리고 있다. 남북관계는 서로 신년사를 발표하며 새해를 맞이했지만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의 파랑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막연한 미래의 행복만 꿈꾸게 할 뿐 아무것도 된 것이 없는 현재는 무미건조한, 일명 파랑새 증후군이나 다름없는 안개 속에서 휘청거린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진보수의 갈등은 새 해가 되었어도 그대로이고, 깨끗하고 좀 다를 것이라고 믿었던 진보 정권도 전 정권들에 비해 별 다르지 않은 모습과 태도에 기대만큼 실망감도 크게 다가오는 새해 벽두다. 한국교회는 과연 다른가? 한국교회도 한국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게 탁류 속에서 탁류 되어 함께 흐르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교회도 우리 사회처럼 진보수의 이념으로
아직도 건국일 하나 제대로 통일하지 못하고 둘로 나눠져 대립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길을 잃으며 방황과 갈등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다. 주변국을 비롯한 세계는 급변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전쟁터 아닌 전쟁터를 만들며 나라 밖으로 진군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저지와’(井底之蛙), 즉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우물 안에서 ‘좌정관천’(坐井觀天)하고 있다. 좁디좁은 우물 안에 앉아 우물만큼의 하늘만을 보면서 하늘이 이러니저러니 한다. 자기 좁은 세계로 하늘을 보며 하늘을 말하는 개구리가 바다를 알리가 있겠는가? 아니 바다에 대한 생각 자체가 있겠는가? 최근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의 모습이 꼭 우물 안에 앉아 우물만큼의 하늘만 보고 서로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개구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청와대와 정부는 남북문제에 정권을 몰입하지만 남북문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고, 한반도와 세계를 위협한다는 북핵의 해결도 오리무중이다. 미중 무역 전쟁으로 촉발된 한국 경제는 연일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 이제 국민 대다수는 서서히 다가오게 될 경제 위기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그들만의 정책을 찬양하며
‘정의’는 인류의 끊임없는 갈망이며 논쟁이다. 정의(正義, justice)를 정의(定義, definition)하기가 쉽지 않음과 시대와 지역과 그리고 대상이 달라 항상 가변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범죄 이후 인간의 속성이 정의를 스스로 주장하거나 정의하기에는 그 정당성이 부족한 것이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정의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마이클 샌델도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텔로스’, 즉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이 정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등을 언급 한 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그 동안 있어왔던 벤담, 칸트, 롤스 등 여러 정의론에 자신의 견해 하나를 추가하는 것으로 책의 끝을 장식했다. 결국 정의를 독자의 몫으로 돌린 것이다. 이만큼 정의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끝없는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한 때, 법치가 사회의 정의인 것처럼 각인되어진 적이 있었다. 정작 그 정의를 외친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했음에도 국민에게 법치적 정의를 외치며 강요했다. 물론 법치가 이 사회를 정의롭게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삼권분립이 분명한 민주제도의 국가이면서도 우리의 정치사는 정
요즘 낙태가 화제다. 낙태가 불법인 대한민국이 낙태율 1위이다. 신생아 수는 40만 명인데, 낙태 수는 110만 건이다. 상황이 이런데 낙태가 합법화되면 하루에 죽는 태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태아는 그냥 핏덩어리나 제거해야 할 암 세포가 아니라 독립적인 생명체다. 이것은 생명과학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태아는 수정 된지 16일 째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40일이 지나면 뇌파가 측정된다. 심장이 뛰고 뇌가 살아 있는데 이게 생명이 아니면 무엇이 생명인가. 태아는 단순한 세포, 결정권, 자유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가장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생명이다. 생명권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요 국가의 책임이다. 그뿐 아니라 낙태를 한 사람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미 모자보건법엔 임산부와 태아를 고려해서 낙태에 대해서 처벌 받지 않는 조항이 많다. 낙태죄는 유지돼야 한다. 태아는 세포가 아니라 아이(child)다 낙태는 가벼운 죄가 아니다. 낙태는 살인이라고 성경은 증거한다. 성경을 추적해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니라.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에게 정혼되었으나 그들이 동거하기 전에 그녀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아이를 가진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두 군데 뿐이다. 하늘(천국)과 지옥이다. 이는 뱃속의 아이나 어린 아이들도 죽으면 하늘이나 지옥, 그 둘 중에 하나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이나 지옥에서 의식을 지닌 채로 영원(eternity)을 보내게 되는데, 그러면 뱃속의 아이와 어린 아이(infant)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신약 성경에는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가 ‘아이들’(children)로 번역되는데, 하나는 ‘파이디온’(paidion)이고 다른 하나는 ‘테크논’(teknon)이다. ‘테크논’은 성별에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자손’(offspring)을 나타내는 데 사용 된다. 반면에 ‘파이디온’은 유아(baby)나 어린 아이(toddler)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을 때, 동방으로부터 현인들이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보고 그 별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왔다. 짐을 실은 짐승과 함께 여행하며, 먼 길을 오는 데는 약 2년 정도 걸렸을 것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사악한 왕 헤롯이 그 사실을 듣게 됐다. 이에 헤롯이 은밀히 현인들을 불러 그 별이 나타난 시간을 자세히 캐물었다. 그리고 현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하되, 가서 그
첫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맑은 강물 울창한 숲과 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시원한 곳으로 삶에 고생한 몸과 마음을 “힐링”(healing)하고픈 계절이기도하다. 흙과 함께 자연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곳 고향이 생각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맑게 갠 유월의 아침 산 숲길을 따라 걸어가며 키 작은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초원을 지나며 인생에 있어서 전환전인 터닝 포인트(Tuming Point)를 생각해 본다. 어떤 상황으로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게 되는 계기 또는 전환점이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지점”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방향이 바뀌는 만큼 다시 시작한다, 새롭게 출발한다란 뜻을 담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비가 있다. 그런 고비를 맞아 어떻게 대처 하는가에 중요한 인생의 새로운 계기가 될 수가 있다. 우리는 향기로운 인생길을 위해서는 누구나 나보다 나은 사람과 관계를 맺기 원하고, 성공하기 위해 좋은 기회를 잡으려고 하고, 보다 나은 생활을 누리기 원한다. 따라서 설령 지금의 상황이 전보다 좋지 않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하자. 실패를 경험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들
제107차 총회는 임시총회를 통해 참으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했다. 오랜 세월 곪을 대로 곪은 침례신학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명제로 소집된 임시총회의는 그 자체가 안타까운 일이었고, 의제에 따라 의사를 찬반으로 대답해야 하는 대의원들의 간절함도 실상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절망 속에 볕뉘 같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들이 그 얼굴 면면에서 진하게 묻어나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제명과 정직이라는 결과 앞에 대부분의 대의원들은 ‘왜 이 지경까지 됐는가?’ ‘꼭 이렇게 밖에 방법이 없는가?’라는 자괴감 속에 이렇게 해서라도 신학교만은 살려야 한다는 소망을 표현해야 했다. 동시에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라는 염려도 상식 아닌 상식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신학교를 둘러싼 많은 문제들과 그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들에서 보여줬던, 또 봐왔던 경험적 지식 때문이다. 이번 임시총회의 결정은 사실상 승자 없는 우리 모두의 패배였다. 그래서 더욱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다음 행동이 또 이전과 같이 법적인 방법으로 다시 싸움을 시작할 것 같은 염려가 생기는 것은 어느 새 습관처럼 되어버린 그 동안의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