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평소의 주장과 이 시대 보다 절실해진 젊은이 사역의 가치를 일깨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기대어 용기를 내어 본다. 필자는 1992년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학년 때부터 2017년 현재까지 약 25년 동안 전국의 여러 지역교회와 대학캠퍼스에서 젊은 영혼들을 줄곧 섬겨왔다. 교육전도사로 처음 부임한 청주의 작은 교회 담임 목사님은 내가 대학시절 캠퍼스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라는 선교단체에서 약 3년 훈련받은 것을 근거로 청년대학부를 맡겼다. 최근 6년은 서울대학교회 담임목사(2012.3~2016.2)와 서울대 캠퍼스 선교사(2016.3~현재)로서 현장에서 젊은 영혼들을 계속 섬겨왔다. 처음의 때는 20대 중반이었고 친구, 또는 형이나 오빠의 마음으로 사역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어느덧 대학생 자녀를 둘이나 둔 가장이 되었을 뿐 아니라, 부모의 마음으로 맡겨주신 젊은 영혼들을 섬기는 입장이 됐다. 그렇다면 50대에 접어든 나는 왜 여전히 젊은이 사역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이 바로 주님이 친히 맡겨주신 개인적 소명의 자리이자 한국 교회가 가장 시급히 회복해야 할 달란트 농
로이드 존스는 신학수업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독서광이었다. 이것이 목회에 힘이 됐고 지혜가 됐으며 방향을 바르게 가르쳐주는 나침반이 됐다. 5. 이동원 이동원은 1945년 12월 해방 이후 수원에서 이방규와 이봉후를 부모로 한 평범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한국의 전통적인 가정처럼 불교와 유교, 샤머니즘이 결합된 종교 배경으로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집안이었지만 반기독교 적이지는 않았다.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기에 조부모뿐 아니라 외증조 할머니에 대한 따뜻한 기억까지 간직할 수 있었고 대가족 속에서 조건 없는 따뜻한 사랑을 경험한다. 그러나 할머니와 어머니의 고부 갈등, 아버지의 중독성 만취현상과 계속되는 직장과 사업 실패로 어린 시절을 고뇌하며 보낸다. 사춘기 시절에는 아버지의 실직과 사업 실패로 어렵게 가정교사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다. 이때 홀로 사색에 잠기면서 점점 더 책 속으로 도피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학교 공부보다 책 읽는 것을 훨씬 더 즐겁게 여기게 된다. 청년시절에는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구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이후 거듭남의 경험을 하게 되면서 전도와 간증의 삶을
하나님의 그 약속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됐지만 아직 믿는 자 안에 완성되지는 않았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됐고,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이 믿는 자들 안에 적용됐다. 이를 성령의 약속이라 했으니(갈 3:14), 바울은 예수의 흔적이라 했다(갈 6:17).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는 토대이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기 시작하셨다는 중요한 표지이다. 신약성경에 의해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고, 말세가 왔으며(고전 10:11), 새 창조가 시작됐고, 영생이 임했고, 새 언약이 현실이 됐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과 약속의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주장한다(갈 3:15-18). 바울은 유언 또는 언약을 모두 의미할 수 있는 “디아데케”(언약)라는 단어를 다루면서, 사람의 언약도 정한 후에 더하거나 폐할 수 없는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도 후에 생긴 율법에 의해 폐해질 수 없음을 지적한다. 아브라함과 맺은 이 언약도 약속 가
여러 언어 중에서 프랑스어가 우리말에 깊이 침투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70년대에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등 젊은 통기타 가수들로 구성된 남성그룹 ‘세시봉(C’est si bong)‘은, 알다시피, ‘It’s very good’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이며; 1960년대 말에 결성되어서‘육군 김일병’과 ‘청춘목장’ 등 건전가요를 불렀던 남성 그룹4중창단 ‘불루벨스 봉봉(Bluebells bonbon)’의 ‘봉봉’ 역시 ‘good’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이며; 색채, 의미, 느낌 등의 미묘한 차이를 의미하는 뉘앙스(nuance)와 ‘함께’라는 의미에서 출발해서 남녀 간의 ‘만남’으로 의미가 발전한 ‘아베크(avec)’도 프랑스어이다. ‘사바사바’는 알다시피, 뒷거래를 통해서 은밀히 일을 성취하는 것을 뜻하는 일본어이다. 이 말의 유래를 찾는 중에, 일제 강점기에 관청 일을 보러가는 사람들이 일을 쉽게 하려고 간혹 고등어를 가져가 일본인 관리들에게 선물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요즈음과는 달리 당시에는 고등어가 귀한 생선이었고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고등어는 ‘고기 魚’ 변에 ‘푸를 靑’을 쓰는 ‘고등어 청(鯖)’ 자로 표시되는 등푸른 생선으로서 일본어
3) Peleh Yo'etz(Wonder of a Counselor, 책사‘모사’의 불가사의‘경이’)라는 호칭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사9:6의 속에는 성령을 암시하는 “Peleh Yo'etz”라는 호칭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구약에는 주로 “하나님의 영” 또는 “야웨의 영”으로 표현돼 있고 신약에는 주로 “성령” 또는 “하나님의 영” 또는 단지 “to pneuma”라고 표현돼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성령을 보혜사(Parakleetos)라고 부르신 것이 요한복음에 기록돼 있는데 이 Parakleetos가 영어로는Comforter 또는Counselor라고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사11:2에서는 성령을 “야웨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야웨를 경외하는 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는 이 말씀 속의 “모략”은 바로 Etzah(counsel)로서 사9:6의 Yo'etz(couselor)와 함께 yaa'atz(advise, counsel)에서 파생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Peleh Yo'etz라는
그렇게 로이드 존스는 20세기에서, 그리고 지금의 21세기에서도 계속 연구되고, 그 영향력이 사그라지지 않는 신앙위인이기도 하다. 그는 21세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목회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목회자이다. 로이드 존스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힌 설교자요, 영성의 대가였다. 그가 일으킨 부흥의 현상들은 분명 그의 탁월한 영성이 맺은 거룩한 열매들이었다. 강단에서 쏟아진 그의 메시지는 마치 타오르는 불길과 같았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영성을 한마디로 강단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강단 영성으로 무장될 수 있었던 로이드 존스의 성경읽기와 독서에 대한 것이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 캐더우드는 그의 아버지 로이드 존스의 독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친 하면 우리는 독서를 연상합니다. 물론 저의 부친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책을 읽었습니다. 읽어도 애독을 했고, 정규적으로 읽었으며, 많이 읽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읽기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독서도 지속적이고 열정적이었다. 심지어 휴가 때나 집회를 인도하러 떠날 때도 반드시 책 읽는 시간을 할애할 정도였다. 긴 사역의 기간에도 오전 시간에는 늘 독서와
“경륜”(오이코노미아)이라는 말은 ‘청지기가 되다’ 혹은 ‘관리한다’ 뜻을 가진 오이코노메오에서 유래된 말로 문자적으로는 ‘청지기직’을 가리키나 일반적으로는 ‘관리,’ ‘경영’ 그리고 ‘행정’을 뜻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의식 활동에 의한 영원한 계획과 작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구원 경륜도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작정과 계획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께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계획하고 진행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 경륜은 그리스도 안에 세워졌고 그리스도께서 인생 안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오이코노미아(경륜)는 ‘관리하는 행위,’ ‘준비 혹은 계획을 관리받는 것’ 그리고 ‘관리자의 직위나 역할’을 의미한다. 후기 교부들의 문헌에서 오이코노미아는 신적인 계획과 구원 계획을 가리키는데 사용됐으며 또한 언약신학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오이코노미아를 ‘언약’으로 이해했다. 여기에 대해 오이코노미아를 하나님의 계획이나 혹은 구원의 의미를 지닌 교부들의 견해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읽으며, 또한 관리나 질서의 능동적인 의미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이에 반대
그리스 신화는 우주와 생명체를 우연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와는 달리 티탄 신족 중의 누구인가가 카오스에 던져진 씨앗을 품은 물질 덩어리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했다는 주장도 있다. 인간이 나타나기 전에 세상에 거주하던 신족 중에 프로메데우스(먼저 생각하는 사람)와 에피메데우스(늦게 깨닫는 사람) 형제는 인간이 창조된 직후에 모든 생명체에 필요한 힘과 기능을 나눠주는 일을 맡았다. 에피메데우스는 생물 하나하나에게 힘, 속도, 용기, 지혜, 손톱과 발톱, 몸을 덮을 단단한 껍질, 자신을 보호하는 독 등등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선물을 다 나눠준 후에서야 인간에게 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형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동생의 말을 들은 프로메데우스는 곧 아테나(미네르바) 신의 도움을 받아 하늘로 올라가서 이륜차에서 활활 타고 있는 제우스의 불을 횃불에 붙여 와서 인간에게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우스는 무슨 의도에서인지 예쁜 여자를 만들어서 ‘판도라’라고 이름 지어 프로메데우스 형제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 때까지 세상에는 여자가 없었으므로 에피메데우스는 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판도라를 아내로 삼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에피메데우스의 집에는 생명체에게
“하나님의 이 증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확증됐기(롬1:4) 때문에 베드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을 받은 후로는 이 사실을 산헤드린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선포했던 것이다.(행4:10) 유대인들을 수신자로 기록한 히브리서의 증언은 어떠한가? (필자는 히브리서를 바울의 서신으로 여긴다. 히13:23) 히1:2, 3 :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apaugasma)시요 그 본체(hupostasis=본질=substance)의 형상(karagma=각인=a stamp, impress)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본질”(hupostasis)을 “그대로 새겨 놓은 존재”(karakteer)라고 말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고 말한다. 특별히 바울은히1:8에서 시45:6,7 말씀을 인용해 메시야께서 “하나님”으로 불리
스펄전은 책 읽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책들을 통달하십시오. 그 책들을 철저하게 읽으십시오. 여러분들이 그 책에 몰두될 때까지 그 책 속에 흠뻑 잠기십시오. 그것들을 읽고 또 읽으십시오. 씹어서 소화될 때까지 그 책들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 되게 하십시오. 좋은 책을 여러 번 정독하고 그것을 기록하고 분석하십시오. 어떤 학생이 20권의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완전하게 이해함으로 그의 정신적인 구성이 더욱 더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서두르는 독서는 조금 배우고 크게 뽐내는 결과만을 가져오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양의 독서에 치중하다가 묵상하는 것을 멀리하게 됨으로 결국 그의 독서는 무익한 것이 되고 맙니다. 독서에 관한 여러분의 좌우명은 ‘풍부하게, 수적으로는 많지 않게’가 되도록 하십시오. 독서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독서의 중요성과 독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없이는 강조할 수 없는 말이다. 또한 성경읽기와 성경 연구에 대해서도 그는 뜨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형제 여러분,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얻을 수 있는 도움을 최대한 이용하여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말한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부활로써 시작된 것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됐고 이제 성도들 안에도 부활의 생명이 역사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세워진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 공동체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아버지’로 알려지기를 바라신다. 제임스 던은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예수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덧붙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서술이 합당하다고 한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악함을 끝낸 후에 재창조주로서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바울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로서 최고의 하나님이라는 더 넓은 개념과는 다르게, 바울은 하나님을 예수와 관련한 그의 행동으로 그리고 죽음에 대해 최후의 승리 안에서 충만함에 이르는 창조에 대한 뜻을 가진 하나님으로서 정확히
그리스신화는 기원전 3000년 경에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서 온 세계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이 되기까지 진화했다. 그러나 그 신화는 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해서 오늘날 올림포스의 신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리스신화는 문학과 철학과 회화, 심지어는 성경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교사와 설교자는 신화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은 가져야한다. 그리스신화 속의 세계와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존재들이다. 기원전 8세기에 ‘신들의 계보’를 쓴 헤시오드는 세상은 무한 공간을 의미하는 카오스에서 나왔고 우주 형성기 말기쯤에 땅에는 인간이, 하늘과 땅 사이에는 티탄(Titan)이라는 신족(神族)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티탄 신족 가운데 젊고 힘센 크로노스가 하늘과 땅을 지배하다가 그의 아들 제우스(로마 신화에서는 주피터)에게 폐위 당했다. 왕좌에 오른 제우스는 그동안 아버지에게 유폐되었던 형제들을 불러내어 포세이돈에게는 바다를, 풀푸톤에게는 하데스(음부)를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신들의 우두머리로서 올림포스 산에서 하늘을 지배했다. 사도행전 14장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
이 구절은 요1:3,10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다. “모든 것들”(만물)이라고 그 범위를 못 박아 놓고 있으며, 그분에 “의해서” 그분을 위해서 창조됐다고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특별히 “그분을 통해서”라는 표현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하며 요1:3에 상응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장자”라는 표현은 오해 받기 쉽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의 장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육체의 몸을 입으심으로써 피조물의 세계에 참여하셔서 그들의 주인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고대 근동에서 “장자”는 모든 형제들의 주인이 돼 그들을 다스렸던 것이다. 요셉의 형들이 그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것은 이런 전통 때문이었다. (창37:8 :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그런데 “모든 충만함이 그분 안에 거주하기를 기뻐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모든 ”무엇이“ 충만했다는 것인가? 그 해답은 2장 9절에서 찾아 볼 수
일반적으로 가족 모임이 있을 때 서로의 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덕담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가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 가정의 자녀들의 외모를 칭찬하며 관례적으로 하는 말들 중에 “야,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잘 생겼구먼” 하는 농담이 있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의 부모들은 오히려 마음 뿌듯해 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물지만 어떤 분들은 이러한 농담을 불쾌해 한다. 심지어 정색하며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면 모임의 분위기가 자못 썰렁해지는 부작용이 따라오곤 한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기 자녀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대단히 기뻐하기 마련이다. 자녀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가 그 자녀들을 낳고 키운 부모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제 간에도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이 노래를 잘 불러서 각종 음악콩쿠르의 대상이라도 탄다면 스승은 누구보다도 이를 기뻐하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간혹 이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못난 스승들도 있긴 하다. 제자가 너무 잘 해서 혹시 자신의 영역이나 자리까지 넘보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제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에 있어서 전통주의와 새 관점주의자들의 관점의 문제점들을 살피고 그 새로운 대안으로써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론을 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그 예로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시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기에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관점에서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갈라디아서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이로써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론을 넓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Ⅲ.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신론적 측면의 구원 신약성경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구약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유대교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쉐마를 고백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이 구절은 유대 사상의 토대였는데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구약성경에 놓인 기초 위에 건축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