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중심성이 구원의 역사, 하나님의 약속들의 성취와 밀접하게 연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슈나이더는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직신학 및 후대의 삼위일체신학으로 빠져드는 것이라는 반대가 있을 수 있으나 오히려 신약성경 자체를 귀납적으로 연구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신약신학의 토대이자 중심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한다. 슈라이너는 신약신학이 하나님께 집중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신학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은 구원역사의 시간표를 따라 진행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약속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됐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는 토대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기 시작하셨다는 중요한 표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구약을 통합해 이해하는 구약학자 브레바드 차일즈(Brevard S. Childs)는 「구약과 신약의 성경신학」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의 연속 또는 불연속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어떤 접근도 거부한다고 하면서 신구약을 통합하여 이해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갈 때 이드로(르우엘)의 아들이자 자신의 처남인 호밥에게 그들과 동행해서 길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모세가…르우엘[이드로]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 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그리하면 선대하리라.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민10:29~32). 그런데 성경에는 모세의 장인 르우엘을 호밥이라고 기록한 곳이 있다(삿4:11). 그것은 아마 호밥이 그의 아버지 르우엘의 대리인과 같은 신분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밥은 이드로의 아들이자 모세의 처남이다. 아름다운 관계 호밥은 모세의 청을 듣고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후에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면서 위험한 광야생활의 길잡이가 되어줬고 가나안 복지까지 함께 들어갔다. 성경은 호밥이 속한 겐 족속이 아랏 남쪽 유다 광야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해서 사울 왕과 다윗 왕이 통치할 때까지도 그 지역에 살았다고 말한다: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삿1:16).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드렸던 기도문입니다. 유일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기도문이기에 진귀한 자료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중요한 내용을 기도하셨지만 기도의 핵심은 “하나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연합의 중요성을 기도를 통해 알려주셨으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주님의 관심은 믿는 성도들이 하나로 연합하는데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 당시보다도 지금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기도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하나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같은 교회 성도들끼리 하나되지 못하고 다투고 한 교단 안에서 분열된 모습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교단과 교단 사이의 벽은 교도소 담벼락만큼이나 높고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백안시하고 교제가 전혀 없는게 한국교회의 처한 현실입니다. 툭하면 분열하고 서로 대립하는 광경을 보고 세간의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까? 주님께서 간절히 드리셨던 기도는 우리가 하나되게 해달라는 것인데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역행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되기를 기도하고 열심히 설교하지만 정작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권위와 리더십이 상
오늘도 심방을 다녀보니 여기저기 넘어진 이들이 있다. 미끄러운 빙판길의 겨울도 아닌데, 마음의 겨울을 보내는 이들이 이 작렬하는 여름에도 있더라. 그래서 목회자는 오늘도 위로와 격려와 기도로 그들을 찾아 일으킨다. 물론 스스로 훌훌 털고 일어나는 이도 있어 감사는 하다만, 우리 삶에 이런 넘어질 일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목회도 그렇다. 사실 세상에 단 한 번도 넘어져보지 않은 목회자가 어디 있으랴. 넘어졌었지만 다시 일어났으니 오늘을 살지. 그러니 혹 이런저런 이유로 넘어진 이가 계시다면 다시 일어서시기를 바란다. 모름지기 목회자는 넘어질 땐 누구에 의해 넘어져도, 일어날 땐 스스로일 수밖에 없음을 일찍부터 깨달아 온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가? 첫째, 은혜를 다시 기억하고 회복할 때이다(단 10:19). 그렇게 믿음 좋았던 다니엘도 한 때는 힘도 없어지고 호흡마저 남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천사가 들려준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란 그 말 한마디에 다시 일어섰다. 그만큼 은혜 채우는 일은 중요하다. 어쩌면 목회자의 넘어짐도 은혜가 마르고, 은혜를 잊어서일 수 있다. 이럴 땐 은혜부터 회복하고 채우는 게 급선무다. 더더욱
웨슬리에게는 매일이 의미 있는 날이었으며 매순간이 “하나님의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매일을 기도와 성서연구와 경건을 위한 영적 훈련으로 보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은밀하게 준비된 일꾼 중에 자기의 백성들이 자기를 잊어버린 동안 하나님의 광야학교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낸 모세가 바로 그렇게 쓰인 일꾼이었고, 다윗과 침례 요한과 바울이 또한 그러하였다. 그리고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가 또한 그렇게 쓰인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든지 이렇게 일꾼들을 들어 쓰셨다. 웨슬리는 영국에서 신앙부흥운동을 시작해 현재의 감리교회 토대를 이룬 창시자이다. 영국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는 책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웨슬리 자신이 많은 글을 쓴 작가였으며, 수많은 책을 저술한 저자이기도 했다. 또한 웨슬리 자신도 열성적인 독서가였다. 22세에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후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는 ‘홀리클럽(Holy club)’을 이끌었는데, 이 모임은 웨슬리의 지도로 경건한 삶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한 목적을
지금까지의 기독교 구원론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관점이나 새 관점 모두 ‘기독론’ 중심으로만 구원론을 이해해 ‘신론’과 ‘성령론’의 관점에서 구원론은 등한시돼 왔다. 성경은 성부 하나님의 작정(뜻)과 성자 하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중보자 되심과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이 구원사역에 있어 균형 있게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성자 하나님의 사역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기독론만 강조하고 발전시켜 왔다. 물론 ‘기독론’은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중세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죄 없는 하나님의 어머니’까지 높여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최근에 ‘신론’ 중심(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구원론을 보완하려는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침례신학대학교 장동수의 최근 논문 ‘신약성서와 하나님’은 신약학회에서 발표한 이후에 신약학회에 많은 도전을 주고 있다. 그는 신약 신학 및 기독교 신학의 일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강조되지 못한 원인을 밝히고 신약 신학을 연구하고 교수함에 있어서 최대 최고 주인공이신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중심신학으로 구약과 신약신학을 통합하는 성경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신약성경이 기독론 중심으
현대인은 매사를 지루하게 생각한다. 해마다 새로운 모델의 스마트폰이 출시되고 첨단기술을 탑재한 승용차와 가전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생각해보면 새로운 서비스와 편리함을 제공하기보다는 사용자들의 권태를 달래기 위함인 것 같다. 우리의 일상생활, 뉴스도 지루하고 정치도 지루하고 사드도 지루하고 김정은도 트럼프도 모두 지루하다. 지나간 천여 년 동안 기독교 문명이 찬란하게 꽃피었던 서유럽에서는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서 현상 유지조차 어려워져 두 세 교회를 하나로 통합 하고, 그래도 안 되어서 아예 문을 닫고 매각해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교회가 헐리고 그 자리에 모스크가 세워진 동영상을 시청하는 우리의 심정은 착잡하다 못해 비참하기까지 하다. 신자들이 왜 교회를 떠날까? 믿음이 없어서일까?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교회가 천여 년 동안 답습해 온 성서일과(聖書日課)에 의존한 감동 없는 예배와 복음이 빠진 설교가 신자들을 권태롭게 만든 것이 더 큰 원인일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 가운데서도 북미주와 특히 한국 교회에서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그러나 최근에 보고된 한 교회사학자의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교회에서도 근래에는 복음과
미국은 지역적 특징, 특산품, 주민들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주 경계를 초월해서 ‘벨트’라는 이름으로 지역을 구분한다. 이런 벨트에는, 눈이 많이 내리고 기온이 낮은 북동부 지역과 오대호 부근을 ‘스노 벨트,’ 기온이 온화하고 언제나 태양광이 풍부한 북위 37도 이남의 캘리포니아 주부터 뉴멕시코 주까지를 ‘선 벨트,’ 곡물 생산이 많은 지역을 ‘그레인 벨트,’ ‘콘 벨트,’ 또는 ‘바나나 벨트,’라고 부르며, 뇌졸중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미국 남동부의 앨러바마, 켄터키, 아칸소, 조지아 주 지역은 ‘스트로크(Stroke) 벨트라고 하며,’ 보수적 성향의 기독교 세력이 강한 동남부 지역은 ‘바이블 벨트’라고 한다. 미국의 45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러스트 벨트’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러스트’는 금속이 부식될 때 생기는 ‘녹’을 말한다. 어떤 지역이 ‘녹 벨트’가 되었을까? 러스트 벨트는 오하이오, 위스콘신, 아이오와, 미시간, 인디애나, 펜실베이니아 주와 뉴욕 등 미국 중서부 일부와 북동부의 공업지대를 말한다. 이 지역은 일찍이 찰강 산업이 발달해서 피츠버그 시는 1800년부터 철강과 알루미늄을 생산하고, 1875년에는 철강 왕 앤드류 카네기가 제철소
순례자가 되어 다녔던 걸음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누리고 깨달으며 각성하고 감사로 더욱 풍성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옛 것을 통해 새것은 배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례의 시간과 경험을 통해 새롭게 다짐하고 결단한 것들을 삶 속에 녹내고 담아내 진정한 개혁의 열매와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서 3:14~19의 말씀을 통해 선교를 다 마친 바울 사도가 로마의 감옥에 수감, 생애 마지막을 보내면서 자신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에베소교회에 보낸 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사도는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를 즐겨 행했습니다(행20:36). 스데반 집사도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자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 당할 때,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기도하고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무릎을 꿇으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모습은 거의 다 무릎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어릴 적에는 예배당이 거의 다 의자가 없는 마루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방석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무
1. [고린도후서 5 : 9~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 선 )( 악 )간에 그 몸으로 ( 행한 것 )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 위의 내용은 신자에 대한 얘기입니까? 불신자에 대한 얘기입니까? 신자입니다. 첫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즉 성도들에게 보낸 내용입니다. 둘째는, “우리”라는 단어가 2번 나옵니다. ‘우리’와 ‘여러분’과의 차이는 현재 말하고 있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포함되어 있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안에도 사도 바울 자신도 포함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2)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 살면서 힘을 안 쓰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학생들은 학생 나름대로 공부하는데 힘쓰고, 직장 다니는 사람은 직장 생활하면서 힘을 쓰고, 사업 하는 사람은 사업하는 가운데 부단히 힘을 쓰며 살아가듯이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앞날의 성공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를 믿고 나면 그 이
그는 히포(Hippo)의 주교로서 펠라기우스(Pelagius)와 도나투스(Donatus)파의 이설을 반박하였고, 초기 기독교의 사상을 수렴하고 중세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중세기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과 지혜에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다. 그는 르네상스의 여러 사상가에게도 영향을 줬으며 쿠사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와 에라스뮈스(Erasmus)도 역시 이에 속한다. 탁월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히포(Hippo)의 감독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바로 고백록(The Confessiones)을 집필했다(A. D. 397-401년). 그가 죽고 난 이후에도 고백록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읽히는 불후의 명저다. 고백록은 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널리 읽혀진 책으로서 철학자들, 문학가들, 심리학자들, 신학자들, 평신도들, 심지어는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애독하는 책이기도 하다. 특별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안식이 존재할 수 없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그의 신앙 표현은 오랫동안 빛나고도 남을 흔적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신앙인의 진심어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당대의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며 동시에 한분이심을 가르쳐 준다. 또한 삼위일체론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고백함으로써 그들의 구속과 구원의 사건을 하나님 자신의 사건으로 고백한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구원의 복음의 진수를 간직하고 보호해 주는 교리이다. A.D. 325년에 열렸던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임을 확정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바르게 고백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의 구별을 최초로 논의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공헌에 따라 하나님은 “한 본질(ousia, one being)이면서 세 위격들(hypostasis, three persons)”이라고, A.D. 381년 콘스탄틴노플 공의회가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 즉 성부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서로 구별이 되면서도,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한분이시며, 동일하시다는 신앙고백을 성경적인 바른 신관으로 확정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한분이시나, 이 한분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1.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4) “죽으리라”는 말씀에 포함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옥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 내용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의인이 죄인으로, 생명이 사망으로,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죽으리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지옥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주심(롬 3:14)”과 같이 아담과 하와 또한 인간의 죄악의 수치를 가리 우기 위해 희생 제물의 피 흘림을 통해 “짐승의 가죽옷(창 2:21)”을 입혀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럼 애굽에서 구원 받고, 홍해에서 침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2길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자 모세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도 아담과 똑같이 2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 [신명기30:19] “내가
따라서 성경만큼 보편적이고 영원한 책은 없다. 성경의 진리는 기록된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살아서 역사한다. 아울러 성경은 삶의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광범위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써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며, 영원한 진리이며, 인류 구원의 유일한 지침이며, 인간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생명의 양식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성령님의 감동하심 가운데 성경을 기록했고, 그 기록된 것을 받은 독자들이 기록된 성경을 읽을 때에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엡 3:1-4). 성경은 읽혀져야 하고, 그 뜻이 깨달아져야 하며, 그 교훈이 개인과 교회에 의해서 실천돼야 한다. 그것은 성경만큼 뛰어난 힘과 영향력, 그리고 감화를 주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거나 또는 중요한 일에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특히 독서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더 확실하게 목적을 되새기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냐하면 목적의식을 갖고 독서하는 목회자와 목적의식 없이 독서하는 목회자는 관심이나 흥미, 책임감이나 집중력 그리고 이해하는 관점에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일단 양적으
비록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가 이신칭의의 관계에서 서로 대립하고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린스의 ‘강권적 은혜’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강조한다고 보인다. 따라서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를 동시에 포용하고 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의 구원은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입장에서 통전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연세대의 서중석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의 이신칭의에 관한 쟁점이 시대의 당면한 문제를 넘어 초시간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 믿음과 행위를 이해해 왔기 때문에 대립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칭의사상은 그것을 필요로 하던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나온 이론이다. 그 정황을 무시하고 그것을 보편적이고 무시간적인 사상으로 전제한다면, 인의론은 다른 양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과 행위에 관한 양면의 칼처럼 대립적 상황을 연출한다. 기독교 신앙이 믿음을 강조하면 행위를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게 되고, 행위를 강조하면 믿음을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게 된다. 이 문제를 취급한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을 통해 그 방법을 찾는다. 그의 방법은 매우 간명하다. 루터의 대안적 방법은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