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교회를 통하여 계속 해나가는 과정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을 준비시켜 사도로 파송하셨다. 사도란 주어진 사명을 위해 보냄을 받는 사람이다. 즉 맡겨진 일을 위해 나가는 일꾼인 것이다. 목회는 일꾼을 세우는 과업이다. 모든 성도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이 있고(요 17:4),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다(행 20:24). 목회자는 각 성도들이 제자로 훈련된 후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 움직이는 사도적 그리스도인(missionary Christian)이 되게 해야 한다. 교회는 일꾼 공동체인 셈이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구명선 또는 전투선이다. 즉 교인 중 누구도 아무런 책임 없이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교인들을 일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1) 일꾼의 의미를 이해하라. 일꾼이란 자신의 은사를 계발하여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속에서 사도적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교회생활을 중요시 하는 침례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교회적 합의에 의해 살아야 하고 일꾼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므
어제‘어’느덧 오산침례교회 부임 만9년. ‘제’비의 날개짓처럼 세월은 참 빠르게도 흘렀다.‘어’그러졌던 나의 처음 모습, ‘제’대로 사역이나 해낼 수 있을까? ‘어’린 아이 같은 믿음만 갖고서 ‘제’값이나 할 수 있을까?‘어’눌한 말솜씨에, ‘제’멋만 믿고 버텨온 인생.‘어’떻게 이 큰 목회 감당할까 싶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 너무 감사하다. ‘어’느새 나도 어엿한 중년 목회자. ‘제’일 고마운 건 우리 성도들이다. ‘어’김없이 날 끝까지 믿어주고 ‘제’대로 섬겨준 성도들 덕분이다. ‘어’디 ‘제’실력만 갖고 사는 이가 있나? 첫째는 주의 은혜, 둘째는 사람의 도움. ‘어’느 누구보다도 귀한 우리 성도. 모두들 다 잘되셨으면 좋겠다. ‘제’발…. ‘어’렴풋이 창문너머 옛 생각이 날 때가 올 것이다. ‘제’날짜 제시간이 되면, 주님 앞에 갈 날이 되면...‘어’물쩡대기만 하다가 ‘제’대로 살지 못했던 어제의 모든 일들이.‘어’느 것 하나 주의 은혜 아닌 것이 없음에도 ‘제’능력인 양 여기며 살았던 모든 일들이.‘어’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스스로 ‘제’동 걸지 못했던 내 삶이. ‘어’두운 밤, 더 이상 일할 수 없고 사
그리고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도 이 새로운 규약과 함께 등장한다. 마태공동체가 유대교의 율법뿐만 아니라 전통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함으로, 마태공동체 구성원이 된 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를 원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마태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으로 전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또한 마태는 하나님의 뜻이 이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다고 묘사함으로, 마태공동체가 하나님과 맺은 새로운 규약의 중요성을 더욱 강화시켰다.이러한 관점에서 산상수훈의 중심인 팔복도 마태 기독교 공동체의 새로운 규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팔복의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은 산상수훈의 수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될 것임을 약속한다(마 5:3, 10). 팔복 가운데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소유하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신해 마태공동체에 새로운 규약을 전달한 것이다. 이것은 마태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취해야 할 믿음의 유형들과 공동체 생활에 대한 규율을 말한 것이다. 즉 산상수훈의 수신자인 마태공동체는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을 새로운 규약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교 사상이
교회목회의 기준과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목회를 하셨고 부활승천하시면서 그 사역을 교회와 사도들에게 위임하셨다. 예수님의 목회를 요약하면 복음을 전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고, 약한 자를 고치셨고; 그 사역을 계속하도록 제자를 훈련하시고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을 목회의 중요한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제자로 훈련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생활을 훈련하며 교회의 건전한 교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로 양육하는 것을 의미한다. 침례교회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음으로 교회의 회원으로 등록한 모든 성도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고 그들을 행한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제자훈련은 신앙적인 생활 훈련이므로 일정기간 동안 정해진 커리큘럼을 수료하면 수료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제자훈련은 교회의 회원이 된 이후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일생 동안 지속적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1) 제자의 일반적 정의 제자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상을 배우고 따르는 사람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감동되고 그 가르침이 좋아
엠마오 현현 사건에서 부활의 주님께서 두 제자의 가리워진 눈을 열어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할 뿐 아니라 그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믿는 부활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 세 번째 하신 일은 그들과 함께 교제하며 음식을 잡수신 일이었다. 두 제자가 그들이 가려는 마을에 가까이 왔을 때, 부활의 주님 자신은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셨다(24:28). 여기서 부활의 주님 자신은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셨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두 제자가 가려는 목적지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그들이 주님을 초청하지 않으면 이제 그들과 주님이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셨다”라는 말은 그들이 주님을 초청하여 영접하지 않으면 주님은 여전이 그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자기 자신의 일을 하시는 제 삼자로 머물러 계신 것을 가리킨다. 누가는 이 구절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는 우리가 그 분을 초청하여 영접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러한 교훈은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보았을 때 달려나가 영접하며 자기를 떠나 그냥 기자나기 마시고 쉬어 가시도록 초청한 사건에서도 제시된다(창 18:1~5).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께서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편2편중에)”사사 드보라, 바락, 기드온에 이어, 사사 돌라와 야일의 통치가 있었던 45년간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히브리백성들은 또 다시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18년 동안이나 블레셋과 암몬에게 압제당하는 식민지의 고달픈 인생을 살아간다. 18년이나 지속된 이민족의 압제를 통하여 만시지탄 히브리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아마도 압제를 받았던 처음 몇 년 동안은 자신들이 왜 이민족의 압제를 받는 식민지가 되었는지를 몰랐을 것이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 36년간이나 치욕을 당한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민족의 굴욕과 아픔이 상당 기간 지속되자 목이 곧은 목석과 같은 히브리백성들도 자신들의 고난의 근본적인 이유
둘째, 유대교에서 분리된 새로운 종파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분리되어 나온 새로운 종파가 그들이 속했던 공동체 지도자들의 지도력을 비판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산상수훈에 묘사된 마태공동체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한 이유는 아마도 율법 해석에 대한 차이로 보인다.마태공동체는 예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보다 율법을 더욱 잘 해석한다고 주장함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각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종파로서 마태공동체는 이미 핍박 가운데 있었다(마 5:10). 마태공동체 구성원들은 언어와 물리적 박해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해를 의미하는 헬라어 dediwgmevnoi는 분사 완료 수동태로 과거와 현재의 박해 상황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이 구절은 마태공동체의 박해 상황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는데, 마태공동체는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면서 핍박을 피하라는 구절을 통하여 더욱 분명해진다(마 10:23). 또한 산상수훈에는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도 나타난다(마 5:44).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마태공동체 구성원에게 자신들을 박해한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목회의 두 번째 목표는 구원받은 신자들을 교회 공동체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다. 교회로 인도한다는 것은 신자들을 책임성 있는 교회회원이 되도록 인도하는 과정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충만히 임하시고 사도들의 전도의 열매로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졌다. 사도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고 교회회원으로 더하게 했다(행 2장). 결신자들을 믿음 안에서 굳게 하며 그들을 교회로 모으는 것이 신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전도자들의 목표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하신 사업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실천하는 주체이며 통로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당연히 교회에 등록해 교회회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교회로 인도한다는 것은 교회에 회원으로 등록시키는 것을 말한다. 교회회원으로 등록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침례, 이적, 그리고 신앙 진술이다. (1) 침례에 의한 방법은 가장 기본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다. 성도들과 교회는 가능한 방법으로 불신자
말은 같은 말이로되 경우와 대상에 따라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같은 말을 하고서도 박수를 받을 때가 있고 비난 받을 때가 있는 것은 시의에 적합한 말을 하거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말이란 공연히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화자(話者)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므로 청자(聽者)는 말을 들고 화자의 관심사와 생각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더욱 바르고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부주의한 말한가한 오후 시간에 몇 목사들이 한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두어 시간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대화의 내용이 시종일관 음식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목사라고 해서 음식 이야기를 하지 말란 법이 없고 또 항상 먹는 이야기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다사다난한 시대 젊은 목사들의 대화가 음식에서 시작해서 음식에서 털고 일어나서야 되겠는가(목회서신 48회 참조).국내외를 막론하고 관광지 목회자는 친구나 지인(知人)의 방문 통보를 받으면 흔히 숙소를 마련(예약)하고, 공항에 가서 영접하고, 다음 날은 관광안내까지 한다. 한 목사가 방문자들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폭포에 안내했는데, 폭포를 본 방문자들이, “이게 다야? 이
예수가 천상의 성소에 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임을 함의한 표현이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기 원하는 자는 반드시 거룩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 물론 본 구절에서 말하는 ‘거룩’은 윤리적인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거룩함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로 제시한 것은 거룩함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요건임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가 본 구절에서 ‘하나님을 보다’를 언급한 것은 구원론을 그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자가 주를 본다’에는 종말론적 의미도 함의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종말이 오면 구원 받은 거룩한 자들은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문헌(구약)과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보다’는 통일성과 이견을 함께 보여준다. 유대문헌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볼 수 있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존재임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려는 특성이 있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님의 감동하심 가운데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 40장 11절이다.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목양의 기본이 양 떼를 돌보는 것인데 그 세 가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영육 간에 양식을 배불리 먹이고, 연약한 양들을 품에 안아 위로하고 안정시키고, 기운 내서 일어나 걷도록 해주는 것이 목회이다. 목회는 양들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목사는 여러 가지 목회활동을 구사한다. 즉 목회활동이라 함은 예배 인도, 설교, 심방, 상담, 기도회, 찬양인도, 성경공부 등등의 목회활동들을 통해 양 떼를 변화시키는 목회가 성취되는 것이다. 목회에서 양들에게 일으켜야 할 변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변화의 목표가 있다. 오늘은 그 중 첫 번 째 것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것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증거해 신자가 되게 하는 복음전도 사역이다. 복음전도 사역은 불신자를 신자 되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해 구원의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단번
단독 목회를 갓 시작하는 젊은 목회자가 작은 교회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순리일 것이다. 그런데, 큰 교회 목회를 꿈꾸다가 작은 교회를 담임하게 되는 이들 가운데는 좌절하고 무력감에 빠지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먼저 스스로 준비된 일꾼이 된 후에 부르심을 기다려야 한다.필자는 기관사역을 하면서 구직자는 많으나 준비된 일꾼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많이 경험했다. 취업이 어려웠던 시절, 교단 안팎에서 자녀나 신자를 우리 부서에 추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원장 선교사의 지시로 막상 구직자를 만나(면접)보면 타자치는 법도, 회계(會計)도 배우지 못했고, 교정 경험도 없어서 사무실이나 출판 관련 부서 등 어느 곳에서도 쓸 수 없는 사람일 경우가 많았다. 대학에서 구직이나 추천을 요청하는 학생들에게 필자는 언제나 1) 출석교회와 봉사분야(믿음), 2) 전공에 대한 전문지식과 자격증(성취), 3) 영어와 워드 프로세서 사용 수준(능력), 이 세 가지 질문을 한다. 준비된 일꾼이라야 채용하거나 추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한국과 같은 교육환경에서 교수가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대학 몇 학과에서 본 교단에 인재가 없어 다른 교단에서 교수를
둘째, 랍비문헌에도 ‘하나님을 보다’라는 내용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특히 랍비문헌들에 묘사된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있었다. 랍비 아키바(Akiva)는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의인화(擬人化) 관점에서 해석한다. 반면에 랍비 이스마엘(Ismael)은 하나님의 현현을 우화적 측면에서 해석한다. 하나님의 현현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육체로 임함을 의미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화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말한 것인지에 대한 차이를 말한다. 이 논쟁은 랍비문헌이 인간의 육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해석으로 확대됐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 분명하다(창 1:26).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음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모습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랍비문헌의 하나님의 현현은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남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의 실제는 종말에야 일어날 사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실제적인 일은 인간이 의인으로 부활할 종말에나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종종 거론된다. 야곱의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은 20에 팔리고, 죄 없이 옥에 갇히고, 애굽의 총리라는 영광의 자리에 앉는 등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행적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요셉의 생애와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훌륭한 롤 모델을 제시해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꿈을 꾸는 자요셉의 가장 첫 번째 특징은 그가 꿈꾸는 자였다는 것이다. 그의 별명은 꿈꾸는 자였다. 우리도 꿈을 꿔야 한다. 꿈은 미래에 하나님께서 이뤄주시리라고 믿고 기대하는 비전이다. 목사에게는 교회의 꿈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통해 어떤 사람을 일으켜 세울 것인지, 어떤 교회를 세울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외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요셉 생애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리고 요셉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며 인식하고 살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이 바로 ‘코람데오’이다. 늘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아비멜렉이 자신의 형제 70명의 왕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독재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 약 3년간은 정치적으로 안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3년 이후부터 하나님의 징계가 시작됐다. 쿠데타는 쿠데타를 낳는 법. 아비멜렉과 손을 잡고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던 세겜 사람들이 오히려 아비멜렉을 반역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겜 사람들의 지도자였던 에벳의 아들 “가알”은 스스로 사람들을 모으고 새로운 반역 세력들을 집결시켰다. 그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 연일 잔치를 베풀고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먹이며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다져나갔다. 우리나라의 특정지역사람들이 라이벌 지역 사람들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서로 매도하고 욕하듯이, 가알도 자신들은 세겜 사람들인데, 왜 바보들처럼 세겜 사람도 아닌 므낫세 사람 아비멜렉을 왕으로 모시고 있냐고 말하면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선동질에 절대로 속지 말아야 한다. 돈 몇 푼에, 알량한 자리 약속에 쿠데타의 사냥개가 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다. 넓게는 국가적으로, 좁게는 직장과 사업터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최고의 권력을 쥐겠노라고 선동질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