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이 말씀에 은혜받아 그날 저녁예배에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신학생은 4인 가족을 돌볼 돈 55달러를 하나님께 전부 헌금했다. 미국 산골 가난뱅이 목사의 아들로 17세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가출하여 방황하다가 폐결핵으로 몇 개월 사이 20kg으로 줄어들자 귀가하여 병중에 성경을 읽는 가운데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서 2절) 읽고 기도하여 고침받았다. 1960년 대전 침례신학교 예과에 입학해 오랄 목사의 전기를 읽고 큰 은혜를 받았고, 미국 털사(Tulsa)에 그를 만나러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그의 놀라운 업적에 놀랐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고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 하나님의 창고를 채우면 복을 쌓을 곳이 없게 부으시고, 또 어려울 때 하나님께 전부를 바치면 부요하신 하나님은 그의 전부를 돌려주십니다!”(말3:10) 이 설교를 듣고 “과부의 생활비 전부”(막12:24)같은 전 재산 18달러 78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대단한 위력을 지닌다. 인문학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 대한 명언 교훈을 던지고, 사회과학 사람들은 인간의 사회적 삶에 대한 명언 교훈을 주고, 자연과학 사람들은 인간의 삶과 자연환경에 대한 그것을 주고, 그리고 의학과학 사람들은 인간의 생물학적 상태를 설명하는 이론을 낸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세상소리다. 그럼 세상소리 명언의 특징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의 소리다. 땅에서 나서 땅에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갈 운명의 사람들의 소리다. 거기엔 영(靈)의 소리는 없다. 오직 육(肉)의 소리만 있다. 세상소리의 한계는 영계(靈界)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순함에 관한 교훈을 두고 땅 사람의 명언과 하늘 사람의 명언을 한 번 대조해 보자. 이하는 계인철의 ‘그리스도인의 심장이 뛰는 사람’(P.146~147)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두 저자가 놓친 것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두 저자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영적인 단순함은 두 저자의 관심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베르너터키 퀴스텐마허-로타르 J. 자이베르트의 ‘단순하게 살아라’는 표피적 또는 얕은 물가의 단순함, 즉 육체적 단순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단순
나도 흘렸다(Me too) 영어성경에는 “예수는 울었다”로 주어와 동사의 두 단어로 신구약 성경 66권중에 가장 짧은 절이요 문장이다. 헬라어인 “에다크루센 호 예수스”로 세 단어로 된 문장인데 한글 번역에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로 되어있다. 예수께서 친구로 불렀던 나사로의 무덤 앞에 한 영혼에 대한 소리 없는 연민과 사랑의 눈물이었다. 신약성경에서 특히 사복음서를 수없이 읽으면서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고”(눅10:21) 또 기뻐하신 기사는 몇 곳이 있었지만 울으신 것은 세 번인데 웃으셨다는 기사는 한곳도 발견하지 못했다. 죄악이 관영하고 패역한 세상에서 처절하게 저주받아 가련하게 죽어가는 인생들을 보시고 어찌 웃으실 수 있었겠는가!라는 생각을 해왔다. 두 번째 우신 시기는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눅19:41~44) 파멸되리라는 예언대로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장군에 의한 공격으로 처참하게 훼파되고 1900여년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민족의 비극이었고, 셋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땀 흘려 기도하실 때(막14:32, 눅22:44) 우셨는데, 히브리서엔 “
침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3:8)를 외쳐 회개의 침례를 주면서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의 길을 예비했고, 예수님도 첫 말씀 곧 일성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로 복음사역을 시작하셨다. 기독교는 회개의 복음이다. 천국은 회개의 관문을 통해 들어간다. “때가 차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외쳤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인데 그 뜻은 죄의 자각으로 마음의 의지와 감정의 변경, 곧 전인격적 전환을 말한다. 천국의 주인공인 예수께서 첫 번 외친 천국선언문은 곧 회개였다. 죄의 지각의 회개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애통을 거쳐 옛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복음에 전적 합당한 새 생활을 회개로 본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살던 인간이 죄악으로부터 돌이켜 탕자같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요, 마귀와 죄악의 옛 발걸음을 180°로 돌아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세계로 새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소극적 후회에서 적극적으로 마음과 생각과 행동으로 과거는 십자가 그늘에 묻고 온전한 부활의 영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삶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에
1950년도를 전후해서 시골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상거래보다 더 신명나는 구경거리는 품바들의 공연(?)이었다. 남루한 옷차림, 며칠 동안 씻지 못한 얼굴들, 일 년 지나도 이발 못 해 부득불 장발된 두발 등 그들의 몰골은 그대로 꾸미지 않은 거지였다. 한 가족 4~5명으로 된 품바그룹도 있고 영 딴판 남남이 짝을 이룬 품바그룹도 있다. 이들이 국밥집이나 과자 파는 상점 앞에 나타나서 각설이 타령을 한다. 이상한 몸짓도 하고 요상한 소리도 한다. 짐짓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생김새가 꾸밈없듯이 그들의 그런 공연도 꾸밈이 없다. 단지 그들의 소원은 과자 몇 개를 얻는 것이나 잔돈 한 푼 얻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생계가 걸린 거리의 공연이었다. 그 주변에 장꾼들이 모여들고 인심 좋은 상점 주인은 넉넉하게 동냥을 하는데, 이때 품바들은 어김없이 앙코르 공연을 한다. 의리가 있고 명예에 사는 그들인 것 같았다. 나는 이런 모습을 십대 소년시절에 매장마다 보고 살았다. 그런데 엊그저께 TV를 틀고 나니까 신세대 품바그룹이 공연을 하는 것을 시청했다. 말하자면 50년대에 있었던 품바들을 모방(模倣)해서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거기 출연한 그 청년들을 TV가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불룩한 큰 자루를 들고 내 앞에 와서 내용물을 쏟아 붓고 사라졌다. 여러 가지 종이돈이 쌓였는데 그중에 외국돈으로 보이는 은행에서 바로 나온 뭉칫돈이 있어 하나씩 집어 상의 안쪽 주머니 좌우에 둘씩 넣으니 양복 두 가슴이 불룩하게 튀어나와서 나머지 흩어진 돈들은 그냥 두고 평생 처음으로 현금 뭉치로 주머니를 채운 기분에 좋아 눈을 뜨니 창살이 환히 밝아온 이른 아침이었다. 특히 목회 초년시절에 교인들이 꿈꾸고 와서 해몽을 가끔 요청할 때 꿈 해몽에 대한 얘기를 부친께도 어려서부터 들었고 특히 대학교 시절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해몽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어서 해몽을 설명해 주기도 했었다. 전번 대통령 선거날 아침 꿈을 꾸고 잠을 깨니 새벽 4시였다. 먼저 끝이 좋으려면 돈조심하라고 충고했던 대통령 후보가 파란 옷을 입고 내 앞까지 왔다가 뒤돌아보더니 정면으로 사라져서 아마도 일바지를 입었으니 부지런히 일 할거라 생각했으나 그 후 다시 생각하니 푸른 옷은 죄수복이란? 이거 안됐구나 생각이 나서 가까운 친구들 10여명에겐 이번 당선자도 부모따라 갈 것이라고 말한적이 있었는데 그대로 되었으니! 돈다발 꿈을 생각하니 이것이 실몽인가? 허몽인가?
“책들이 책상 위에 있다.”(The Books are on the desk)는 위 짧은 문장에 만일 ‘on’이란 간단한 전치사 하나를 빼버리면 문장은 이상하게 변한다. 가령 “The books are ( ) the desk”이면 “책들은 책상이다.”가 되어버린다. ‘책들≠책상’이 ‘책들=책상’이 된다. 왜 이렇게 엉뚱한 문장이 되었는가? 책들이 책이지 왜 책상이 되는가? 이런 터무니없는 변화는 ‘on’이란 전치사 하나가 빠져버린 때문이다. 이 짧은 영문에 ‘on’이란 전치사는 문장의 의미를 죽이거나 살리거나 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다. 그까짓 전치사 ‘on’ 하나 떼어버리자고 하면 그땐 문장은 완전히 죽어버린다. 사람들이 율법의 한 획 정도야 지키지 아니해도 율법체계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10가지 율법 중에 9가지 율법을 잘 지켰으니 한 가지 율법은 지키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느냐고. 곧 한 가지 율법은 범해도 나머지 9가지 율법은 지켰으니 율법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마치 ‘on’이란 전치사 하나 빼버리기로 문장 의미가 달라지겠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그게 하나 빠지면 그 문장은 완전히 죽어버린다. “네 부
토요일만 되면 우리가 살던 울릉도는 주사골 동리에 올라와 노란종이를 나눠주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마침 우리들 3,4학년이 같이 모여 놀이를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노란 종이를 나눠주고 떠났다. 친구들은 예수쟁이가 우리 동네까지 와서 선전종이를 뿌린다고 욕하고 받은 종이를 찢어버리기도 하고 또 코를 풀거나 그것을 모아서 뺀또(종이치기)를 만들기도 했다. 언젠가 배석문 담임선생이 “요사이 서양종교인 야소교가 설치니 조심하고 멀리하라”고 하셨기에, 친구들과 불교신자인 나도 5학년인 한상태를 따라서 “예수를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큰 소리로 복창하며 예수쟁이를 따라가며 놀려댔으나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가만히 지나갔다. 한번은 공짜로 이발해주는 곳에 가자고 해서 옆 동네인 중간 모시게까지 따라 갔더니 그 노란종이 나눠주는 그 사람이 아닌가! 나는 뒷줄로 섰다가 도망칠까 했더니 친구들의 눈짓 만류로 길가에 고개 숙인 채 이발을 하고 부끄러워 인사도 못하고 도망쳐 왔는데, 나중에 중학교 1학년 때 교회에 나가면서 더욱 그 노란종이를 나눠주던 이웃교회 집사에게 미안했고 지금까지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어려서는 부친이 믿는 유교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생명(生命)은 살아있어서 사명을 지녔다는 의미다. 생(生)은 명(命)을 가지고 있다. 생이 명을 잃으면 그땐 생도 잃는다. 명이 있는 한 생은 유지하게 된다. 생은 사(死)의 반대 개념으로 대단히 긍정적인 것이다. 밝고 명랑하고 화창한 게 生命 곧 살아있음이요 살아있음엔 의미가 있다. 독일 라이프치히 3월 거리를 걷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작은 돌로 포장된 거리의 그 틈 사이로 겨울 찬 공기를 맞으면서 이름 모를 잡초가 고개를 들고 있지 않나. 독일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귀국해서 한국 구리시의 인도도 그러했다. 生이 있으며 어찌하든 움직인다. 상승한다. 퍼진다. 미초의 생명 지키기도 성스럽다 할 것 같다. “행복 생활의 지침”이란 잡지에서 서울 의대 채종일 명예교수가 발표한 ‘기생충들의 흥미로운 생활상’이란 글을 무척이나 흥미롭게 읽은 바 있다. “회충이 가족계획을 한다”는 설명이었다. 회충은 자기가 붙어살아야 할 주인이 필요하다. 자기가 기거해야 할 숙주(宿主)가 있어야 한다. 그 숙주가 없으면 회충은 붙어 살 공간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놈의 회충의 번식이 기하급수적으로 속도를 내게 되면 회충이 포화상태로 사람을 정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일 설교 준비와 침례교전국사모회의 설교준비도 마치고 모처럼 뒷산을 올랐다. 작년에도 한번 만나 인사한 공 목사님과 한 시간 넘게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통합측 교단의 목사로 은퇴하고 2년 후에 마지막 때의 사명으로 이스라엘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동안 여유있는 직장에서 히브리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성경공부도 새롭게 열중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젊어서 목회할 때 두 번의 입신의 체험을 했는데, 그 놀라운 경험은 완전한 변화의 계기가 됐으며 찬란한 천상세계와 지옥의 참경험은 정반대의 경험으로 주님 앞에 신실하고 충성스런 목회의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는 나의 십자가의 은총과 서울교회 목회 중 참담했던 유치원 화재로 욥이 겪은 원수 악마의 혹독한 시련과 같은 환란을 극복한 “주님의 합력선”의 역사를 듣고 공감하면서 그도 아래와 같이 간증했다. 그가 2000여명의 교회에서 목회할 때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역했는데 장로 피택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다. 그 장로 후보자는 많은 친족이 있었고 교회와 다른 장로들에게도 영향력 있는 자로 결국 장로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된 상태였다. 그가 장로 장립을 허락하면서 대신 목사인 그가
소아렌 선교사는 길거리에 다니면서 복음전도지를 나눠주며 뿌렸다. 하루는 매우 거들먹거리는 김익두란 청년에게도 전도지를 줬더니 그는 받자마자 전도지를 코를 풀어 던졌다. 이것을 본 서양선교사는 “청년, 그 코가 썩을 것이요!”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그 청년은 그때부터 코에 고약한 냄새가 나더니 계속 썩은 냄새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선교사를 찾아가니 마침 집회중이라 계속 참석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후 고약한 냄새도 사라졌다. 김익두 청년은 회개하고 간증문을 써서 지인들에게 보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됐으며 한국교회의 유명한 부흥사가 됐다. 김익두 목사는 법정에서 일본의 검사가 “영감님, 예수 천당, 소리를 그만하라는데 왜 계속해서 혼 구멍이 납네까?”라고 했더니, 눈을 번떡이며 검사를 쏘아보며 “검사 양반, 내래 온 천신에 예수 신이 꽉 차서 소리치지 않으면 안됩네다!”고 말하자 일본 검사는 혀를 차며 “저 영감을 저렇게 예수에게 미치게 하는 그 엄청난 힘은 무엇일까?”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화이다. 1967년 사복군인으로 춘천군인 복지센터 관장으로 있으면서 춘천교회 부목사으로 봉사할 때에 유명한 복음전도자 오스왈드
한번은 윤태준 목사의 초청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말씀 중에 가끔 던진 질문으로 “대접받는 것, 대접하는 것, 대접받고 대접하는 것 중에 좋아하는 것에 손을 드세요”라고 질문했다. “셋 중에 대접받는 것이 좋은 사람 손 드세요”라고 했더니 1/3정도가 손을 들었다. “솔직히 대접받고 또 대접하는 것도 좋던데요”하면서 내가 손을 들자 2/3정도가 날 따라 더 손을 들었다. “그러면 대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 손 드세요”라고 했더니 성가대원 전부가 손을 들었다. 놀라 다시 손을 들어보라 했더니 역시 전부였다. 축복받은 성가대원들에게 큰 박수를 쳤다. 예수님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2),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비이기적이고 희생적으로 강도 만난 이웃에 대해 봉사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깨달아야 한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3:11)라고 침례 요한도 말했다. 우리도 우리의 것으로 남을 도
“내가 뒤돌아보니 너한테 잘못한 것이 너무 많다. 다 잊어버리래이….” “어머니 별말씀을 내가 엄마한테 애먹이고 잘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다 용서하시고 먼저 천국에 올라가시이소. 마지막 소천 기도를 올립시다.” 봄에 위암의 진단을 받으시고 8개월쯤 지나 흔들의자에 앉아 기도 중에 조용히 임종하신 어머니 앞에 눈물을 흘린 기억이 어버이날이 올 때마다 새롭다. 어려운 울릉도 주사골 농촌 살림에 10남매를 낳아 아홉째 아들은 어려서 일찍 보내고 9남매를 키우느라 수고하시다 절간을 접고 40세에 중병이 들어 교회에 나가든 중 “하나님요, 날 좀 70세까지만 살려 주시이소!”라고 간절한 기도에 응답받아 30년을 더 사시고 만 70이 되어 소천 앞에 모자간에 회개하고 먼저 천국가신 어머니의 “야! 이 자식들아, 너희들도 커서 장가가고 시집가서 자식새끼 낳아 키워보면 그때야 내 마음을 알끼다!”고 가끔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아래에 떠오르는 이야기는 저의 경험의 거울처럼 잊을 수 없는 교훈이었다. 설빔으로 받은 옷을 화롯가에서 태워 버린 날 밤새워 울던 동생을 보고 다시 사 줄 테니 울지 말라며 위로하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이번 설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영국 스코틀랜드의 어느 작은 시골 장로교회의 목사님에 대한 일화를 읽은 일이 있다. 당시 공업화 현상으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가는 작은 시골교회인지라, 목사님이 그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또 그 동리의 사람들은 까다로운 사람들로서, 저들의 마음은 차가웠고, 복음의 진리에 대해 도리어 매우 적대적이었다. 이러다 보니 그의 사역을 통해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장로들의 선동에 의해 목사님은 강제로 교회를 떠나게 될 판이었다. 하지만 이 시골교회를 고생하며 섬겨오던 목사님의 사역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건이 있었다. 어느 주일 예배 중 헌금 쟁반이 돌려지고 있을 때 한 소년이 쟁반을 받아 바닥에 놓고는 일어나 그 위에 올라섰다. 이 이상하고 괴이한 일을 보고 책망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자. 그 소년은 “나는 어리지만 목사님의 삶과 사역에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오늘 나는 드릴 것이 없어 나 자신을 고스란히 하나님
이 지방회는 독일 선교사 목회자로 떠날 전도사를 위해 목사안수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목사 후보자 전도사는 침례교 목사안수 요건을 다 갖춘 자인 것만은 사실이나 갑작스러운 독일로의 선교 목회를 떠나는 만큼 서둘러 목사안수를 받아야만 했었다. 듣건대 목사 안수를 받는데 꽤나 시간을 요한다고 하는데 이 지방회는 속전속결식으로 목사안수를 진행했다. 그러나 결코 약식은 아니나 속식(速式)이었다. 이 지방회는 두어달 만에 면접시취, 구술시취, 논제시취를 끝냈다. 이미 독일에 체류한 전도사가 2주간의 비행기 티켓을 가지고 곧 현지로 돌아가야 하겠기에 속전속결로 해줬다. 이 지방회는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게 해야 하는 지방회였다. 듣건대 목사 안수를 받는데 엄청난 경비부담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 지방회는 무경비 안수를 치렀다. 주변을 보면 시취위원이니 안수위원이니 해서 몇 차례 모일 때마다 식사대접, 그놈의 거마비에 혼줄이 나는 어린 전도사들의 처지였다. 그러나 이 지방회는 그런 전례가 없다. 지방회에서 모든 것을 사양하는 바람에 목사안수 후보자는 겨우 사정하에 간단한 중식이라도 제공할 수 있는 특전을 얻었다. 전도사를 독일 선교사 목사로 추천한 교단의 어떤 어른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