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침례회 원로목사회 위문잔치 모임이 교역자복지회(회장 황인정 목사) 주관으로 지난 4월 말 2박 3일 일정으로 가평 필그림하우스에서 있었다. 연세가 70, 80, 90세가 된 200여 원로목사님 내외분들이 모였다. 모든 프로그램이 부담 없이 휴식처럼 되어 있지만 그래도 한 프로그램만은 예배 중심과 설교자의 말씀 전하는 시간이었다. 마침내 강사가 등단했다. 오시느라고 수고하셨다는 예의 인사와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난 뒤 바로 말씀선포로 직행했다. 주제는 “천로역정에 나타난 기독교 7대 영성”이었다. 그 자리에 참여한 나는 순간 ‘아차’했다. 언제 천국 갈지도 모를 목회 노년의 노 목사 부부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주제를 유인물로 해서 전한다는 것이 노 목사들에게는 부적절한 내용이 아니겠느냐는 나 나름대로의 제법 재치있는 판단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가령 노년까지 살아오시기에 어떤 수고가 있었느냐니 혹은 이젠 노년에 편안히 쉬시고 하늘소망 가지시라고 하면 노 목사 부부에게 어울릴 것 같은데 강의 내용은 딴판이었다. 천로역정 기독교 7대 영성을 유인물에 있는 대로 한 자 한 구도 빠지지 않고 설명해나갔다. 이 강사는 노년 목사라도 복음 선포자로 완주(完走)해야 한
사람은 만물 중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창2:22)라고 말씀하셨다. 천지창조 다음으로 하신 기적은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사람의 창조이다. 흙을 주물러서 남자인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 하와를 만드셨다. 남녀를 만든 재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말씀하셨다. 1950년대 러시아에서 생화학자들이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 엄청난 재원을 들여 인체의 구성요소를 합성하여 사람의 육체 모양은 만들었으나 살려낼 수는 없어 생명은 연소(燃燒)에 있다고 믿고 불꽃 속에 있는 생명을 코로 불어넣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재원만 낭비하고 결국 실패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a living soul, 生靈, 창2:7)이 됐다. 2004년 12월 6일 타임지에서 ‘우주의 수수께끼’(Cosmic Conundrum)라는
인생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존재하기 시작했으나 그 인생의 시발은 모태로부터의 탈출이다. 10개월이 아닌 장장 3년을 어머니 모태에만 남아서 살겠다 하면서 거기서부터 탈출하려 하지 않은 고집쟁이 인생이라면 어떨까. 그런 고집쟁이는 아무도 없다. 모태로부터의 탈출이란 의학적으로는 출산이다. 어머니는 출산하였고 아이는 출생했다. 탈출은 못 있을 곳이기에 그곳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은 말이 되지만 천국으로부터의 탈출은 말이 안 된다. 인간의 삶이란 탈출해야만 하는 땅에서 시작된다. 존재는 한 시점의 사건이지만 존재의 양태는 언제나 탈출이다. 탈출은 이동을 말한다. 인간은 식물적 존재가 아니라 동물적 존재이니 그 자리에 박힌 것이 아니라 맨 날 움직이는 존재다. 탈출은 발전을 향한 발 뛰어 놓음이지만 탈선과는 다르다. 탈선은 어느 시점이든 정상에서 벗어남이요 정상의 부정(不定)이요 파괴다. 출생한 영아는 태아(胎兒)의 자리에서 탈선한 것이 아니라 탈출한 것이고 배 속에서 세상 밖으로의 이동이다. 다 자란 청년이 되어서는 부모의 품안에서부터의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 인간은 캥거루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부모로부터 탈출을 결혼이라고
“최재선 전도사, 지난 주일 나는 느티나무 밑 숲길로 도안교회에 오르다가 독뱀에게 물려 뱀독으로 오른쪽 발이 너무 퉁퉁 부어 올라 걷기가 힘드니 내 대신 가서 수요일 예배를 인도해 주시요!”라고 했더니 당시 나도 사례 없이 봉사하므로 다른 신학생들은 몇 사람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최 전도사는 계룡버스로 유성에 가서 걸어서 십리길로 도안교회에 잘 다녀와서 나는 고마움을 기억해왔는데, 1971년 9월 초에 부산 남문교회 개척 목회시 최 전도사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모님을 수소문해 선교사 우기수 침례병원 원장에 잘 부탁하여 취직시켜준 일이 이었다. 당시를 생각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묵히 농어촌 개척교회를 충성하여 섬기다 천국간 최 목사와 홀사모의 얼굴이 떠오른다. 얼마 전 가평 필그림 하우스에서 교단원로목사부부 초청위로회에 3년 만에 하룻저녁 참석하니 1년 동안 소천하신 7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려운 시절 한평생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다 천국에 입성한 선배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날 앞을 못 보기에 인도를 받는 목사, 휠체어를 탄 목사, 걸음걸이가 매우 시원찮은 분, 말을 잘 못하거나 귀가 잘 안 들리는 분, 기타 병자와 독거노인 등등 나도 언젠가 가야할
“개울물이 쉬지 않고 흐르면 강과 바다를 이룬다”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축내고 놀기만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얻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비유에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7~48)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께서는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지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았느냐”(마25:26)고 책망하셨다. 19세기의 유명한 시인 롱펠로우(W. Longfellow)의 말을 들어보자. “행동하라! 세계의 넓은 내일을 위하여 행동하라! 세계의 넓은 들판에서 또는 인생의 싸움터에서 목 매인 송아지처럼 쫓기지만 말고 투쟁하는 용사가 돼라!”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32세에 비극적인 유서를 작성하고는 그의 형제인 칼과 존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유서엔 삶에 대한 회한과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으로 지냈다.
19세기에는 유물론과 이성적 합리주의가 서구세계를 지배하게 됐다. 유물론은 물질과 그의 운동 및 변화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오직 볼 수 있는 물질과 실험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합리주의자들은 모든 경험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구하며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모든 문제들의 주된 지침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이성을 최고의 권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러므로 후기 계몽주의자들은 여기서 나아가 현대과학의 관찰과 이성에 기반을 두며 결론을 유출하는 귀납적 방법을 통해 탐구를 시도했다. 여기서 과학의 업적에 의한 실제 세계는 목적에 의해 통치되는 실제 세계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라는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곧 자연이야말로 존재하는 것들의 총체요, 진정한 실제라고 봤다. 따라서 과학자가 자연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마술사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합리주의 신학자들, 곧 신신학자로 불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마저 기독교 신앙에 뺄 수 없는 꼭 필요한 기적 사건을 과학과 상충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속단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불트만(
그리스도인의 대정부관계는 선거 전에는 “좋은 대통령을 주세요”(Oh, Lord, give us a good president)였다면 선거 후에는 “좋은 대통령을 만들어 주세요”(Oh, Lord, make a good president for us)라고 하는 것이 백만 번 온당한 태도일 것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면서 태극기 부대와 촛불 부대는 전쟁을 방불케 했으나 종전된 지금에 와서는 평안 질서 안전 그리고 발전의 국가가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경적인 자세일 것이다. 어쨌거나 현실세계의 태극기라는 기(旗)와 촛불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설명되고 있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민수기를 펴 보았다. 민수기(民數記)는 번호(Number)이니 이는 싸움터에 나갈 장병의 수효를 센다는 책이다. 주로 민수기 2장에서 동서남북 4진영으로 나눈 군대 앞에는 군기(軍旗, Standard banners)가 펄럭이었고 그 군기 따라서 장병들이 행군하고 있었다(민2:2,3,10,18,2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민2:34) 이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 구약성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맏형이 장가가서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었을 경우 그 밑의 동생들이 형수에게로 가니 그 가문의 대(代)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이다. 신명기에 이런 말씀이 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신25:5) 사두개인들이 예수에게 궁지에 몰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던진 질문은 7형제가 다 죽고 나면 남은 여자 한 사람은 부활 때 어느 형제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신명기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는 형제의 집을 세우는 것(building up brother’s family line)이 이 세상사는 동안에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부활 때는 아무 상관없는 이 세상 이야기였던 것이다. 사두개인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예수 대응은 결정타를 던졌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성경의 문자와 그 문자가 말하는 의미를 모르면 성경 무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5~58) 강원도 산불이 나서 산과 동리를 태우는 모습을 보고 나는 눈물을 닦으며 기도했다. 산과 집은 불타도 나무는 심으면 되고 집은 새로 잘 지으면 되지만 불 속에 사람을 태우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하나였고 10여명이 다쳤다는 TV뉴스에 나는 또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가끔 듣는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리며 머리끝이 쭈뼛 상기될 때가 서울교회 유치원 화재사건 이후엔 가끔 있었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 16일 정오를 기하여 서울교회 교육관 1층 유치원에서 화재가 나서 삽시간에 2층, 3층을 불길로 덮었다. 소방서의 화재진압 후에 현장과 병원에서 죽은 아이는 6명이었으나 화상 당한 아이는 7명으로 그 후 만 4년간 당한 금식과 기도의 눈물에 수습까지의 수난과 고통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은 인격의 사대요소이므로 우리는 십자가로 심사언행(心思言行)을 삼가야 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여기서 사람은 무엇보다 첫째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사람은 마음의 바탕에서 생각이 떠오르며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한 대로 행동하게 되므로 “심사언행”이라 본다. 하와가 마귀의 유혹으로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쳐다보니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마음에 먹고 싶은 생각대로 따먹고 아담도 함께 범죄케 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라고 첫 번째 계명을 말씀하셨고, 바울사도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히3:8)라고 권면했다. 다윗 왕은 궁궐에서 건너편에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심이 생겨 우리아 대장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어 죽게 했으니 모세의 십계명의 5, 6계명 곧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인륜의 첫 두 계명
요사이 유행가 중 “저 강은 알고 있다.”라는 노래가 있다. 어쩌면 그 가사가 80대 시니어들의 10대 이야기를 말 해 주는 것 같았다. “비오는 낙동강에 저녁노을 짙어지면 흘려보낸 내 청춘이 눈물 속에 떠오른다. 한 많은 한평생에 눈보라를 안고서 모질게 살아가는 이내 심정을 저 강은 알고 있다. 밤안개 깊어가고 인적 노을 사라지면 흘러가는 한세상이 꿈길처럼 애달프다. 오늘도 달래보는 상처뿐인 이 가슴 피 맺힌 그 사연을 설움 사연을 저 강은 알고 있다.” 나의 10대 시절은 내가 알고 있다. 일제 강점기 1937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것은 조국을 마다 해서가 아니라 아버님이 노무자로 그 곳에 가셨기 때문에 출생지가 일본이 됐다. 나는 해방 직전 어머니랑 누님 그리고 동생이랑 귀국했고 아버님은 그 곳에 계시다가 해방 후 귀국하셨다. 강점기 초등학교 1학년 때 8월 15일 조국은 해방됐고, 6학년에 한국전쟁이 터졌으며, 중학교 3학년은 전쟁 중 선배 형님들의 피 값으로 살아남았고, 휴전직후 군 입대 해보니 무슨 군대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지 않아서 동상이 걸리고 굶주린 배를 안고 군 생활을 보냈다. 낙동강 전투에서 낙동강은 핏물 강이 됐다. 대구 직전
초등학교 4학년 때 외사촌이 넘겨준 예수의 만화책에서 “예수는 병자치유, 귀신축사, 죽은 자를 살렸고, 물로 포도주, 떡 몇 개로 4000명, 5000명을 먹였고, 바다 위로 걸었고, 말씀 한마디로 바다의 풍랑을 잔잔하게 했고, 심지어 바다 속의 물고기 입속에 동전이 들어 있는 것까지 아셨는데, 십자가에 달려 고통 중에 죽는 모습이 너무 애처러워 만화책 마지막 부활의 사실은 아예 믿지도 않고 던져버린 기억이 떠오른다.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 핑계로 교회에 안 나간 나는 한국전란 중 1951년 8월 3일에 교회에 나간 것은 아버지가 나의 입학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결과 17개 초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시험에 울릉중학교에 2등으로 입학해 B반 학급의 급장이 된 것이 네가 잘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도 응답이라고 호되게 꾸짖는 바람에 마지못해 저동교회에 나간 이후 대구 영남고등학교 졸업 이후까지도 부활을 안 믿었는데, 한남대학교에 입학하자 설교대회에서 우재돈 선배가 1등하고 이사야 53장으로 예수의 십자가 주제로 눈물고인 설교로 나는 2등을 하면서 부활 신앙이 그때서야 생겼다. 우리 인생은 고독을 먹고, 실패를 마시며, 슬픔과 두려움 속에 살기에 우리의 삶이 서럽
그 사람의 마지막 떠나는 장례식에 조문객이 모였다. 땅에서는 “이래 살다 갈 것”하고 하늘에서는 “그래 살다 올 것”하는 소리가 내 귀에는 선명하게 들린다. 땅이나 하늘에서 들려오는 이런 소리에는 그 사람의 일생이 유감스러웠다는 것을 한탄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이래 살다 갈 것”하는 유감스러운 마지막 작별인사는 어이된 셈인가? 어째서 이래 살다간 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첫째로 한 평생을 찢어지게 가난에 시달리다가 떠나가는 고인의 뒷모습이 한없이 처량하다는 것이다. 바가지 고생만 하다가 가누나. 둘째로 이래 살다 갈 것 쯧쯧하는 이유는 만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생전에 남에게 좀 베풀고 갈 것이지 어쩌면 그렇게도 인색했더냐는 것이다. 호주머니 풀지 않고 있다가 어디 가서 풀려나. 셋째로 자기에게도 좀 여유 있게 베풀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너무도 자기에게 인색했던 그의 삶이 가련하다는 것이다. 외국 여행 한번 못하고 입맛 따라 밥 한 그릇 사먹기를 벌벌 떨었으니 말이다. 마지막 유감천만스러운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그의 무신론적 생활이다. 그토록 영원 구원 전도를 했건만 고개 짓더니만 그냥 가는구나. 차차 믿는다고 미루더니만 영원
사순절을 맞으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쳐다보고 깊이 묵상하며,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십자가 뒤에 올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고, 오순절의 성령 충만을 체험해 초대교회처럼 복음 전도에 죽도록 충성하는 새로운 결단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만화책에서 본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림은 7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 10세쯤 됐을 때까지 공부에 취미를 못 붙이고 있었다. 여름에는 수영과 다이빙, 우럭잡이, 봄과 가을에는 산에 올라 과일, 산열매(뽈두, 딸기, 머루, 다래, 마구막 등)따기로, 겨울에는 스키를 타느라 공부를 멀리해서 1학년 통지표는 2등이었는데, 그것은 꼴찌에서 2등을 한 것이었다. 그래도 공부는 안하고 만화책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공자와 석가모니의 만화책을 주어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하루는 사촌이 만화책을 갖다 줬다. 제목이 “예수 그리스도”였다. 나는 엄마 따라 절에 나가는 ‘불자’인에 만화책이니깐 상관없이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좋은 말씀도 하고, 병자도 고쳐주시고, 귀신도 쫓아내시고, 음식도 먹여주시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내신 죄 없고 선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 십자가
비숍 고르(Bishop Gore)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상(非常)한 것을 하도록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日常的)인 것을 비상하게 잘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저 멀리에 있는 큰 것을 취하기 위해 눈앞 발밑에 있는 것을 소홀히 한다. 사람들은 큰 것을 취해 놓으면 작은 것을 저절로 취해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눈앞 곧 발밑에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저 멀리 큰 것을 갖도록 질서를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을 하늘 양식 구하는 것 못지않게 귀한 것으로 생각하셔서 우선 일용할 빵을 구하라고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셨다. 건강은 늙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 시절에 특별히 유의해야만 얻는 것이라고 했다. 너무 멀리 그리고 큰 것을 취하려다가 눈앞의 작은 것에 대한 사랑을 잊는다. 하나님은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큰 것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율법을 주시고 나중에 실재를 주셨다. 구약을 주시고 신약을 주셨다. 강한 사자라도 연약한 토끼 한 마리 사냥에는 전력투구한다고 하지 않나. 영문학자의 꿈을 가진 희망자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기 전에 ABC 알파벳부터 배워야 함이 순서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