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태 신앙인”이었습니다. 혹자는 우스갯소리로 “못 해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30년 넘게 큰 어려움이 없이 평탄하게 살아오면서 믿음 좋으신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신앙도 뜨겁지 못하고 영혼에 대한 간절함도 느끼지 못한 채 안일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제가 전도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된 것은 서울로 이사 오기 전에 다녔던 수원교회 조충구 목사님을 만나고부터였습니다. 목사님은 매주일 오후 교인들과 함께 노방전도를 나가셨는데 그 때 웬만한 신앙인은 모두 나가는 터라 저 또한 그냥 따라 나갔습니다. 그동안 아는 사람에게 교회에 나오라는 말은 했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용기를 내게 되었고, 3주차 나갈 때는 간절히 기도하고 나가서 처음으로 나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불과 10여분 만에 그 사람이 뜨겁게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2년 이상 주일 노방전도를 나가며 전도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을 때, 학교 동료 선생님으로부터 “전도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13주 과정인 전도훈련에 참가했습니다. 그 전도훈련은 1주일에 한번 교육받고, 그 방법대로 그 주간에 1명이상에게
마태복음 5, 6, 7장을 통칭 산상수훈이라 칭한다. 이 제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산에서 내리신 교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훈이라 하기엔 우리에게 너무 무거운 짐인 듯해서 통칭하던 수훈이라 하지 않고 장수를 말하게 된 것이다. 평상시에는 필자도 산상수훈으로 부담없이 부르고 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5:39~41) 나눠 줘야 한다는 교훈에 이르러서는 선뜻 실천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서강대학교 영문학 교수였던 고 장영희 씨는 그의 에세이 “내 생애 단 한 번”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부가 옆 좌석에 있는 사람들과 각인이 지금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 나눠 주기를 해 보라고 해서 겪은 경험이라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가방이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서로 나눌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다. 봉헌금만 가지고 달랑 맨 몸으로 갔던 나는 당황했다. 아무리 주머니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다. 구원은 마치 손의 손등과 손바닥처럼 회개와 믿음의 양면성 가지고 있다. 신구약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회개의 촉구’이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향하여 목이 곧고, 얼굴이 뻔뻔하고, 이마가 굳은 백성이라고 외쳤다. 목이 곧은 것은 교만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얼굴이 뻔뻔하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요. 이마가 굳다는 것은 회개하는 지혜가 없이 자기의 소견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선지자였던 침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고 외쳤고,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선포했다. 예수님은 침례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
웬 세상에 별일이 다 있는 것 같다. 열대 사막에서 난로를 팔고 추운 지방에서 냉장고를 팔며 사하라 사막에서 스키기구를 팔아서 돈 버는 기업 세상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상술(商術)이라 하고 마케팅 정신이라 한다. 마켓 3.0시대의 브랜드 관리자는 소비자의 욕구에 맞춰 브랜드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야단들이다. 그러고 보면 브랜드 관리자가 지닌 고유한 상품은 없다. 오직 소비자의 욕구에 따라 유동하는 제품만 그 때 그 곳에 출현했다가 어느 사이에 또 사라진다. 묻노니 복음도 상품 복음인가? 성도는 복음의 소비자인가? 성도의 욕구와 기호에 따라 복음이 바꿔져야 하는가? 복음도 일종의 브랜드란 이름을 붙여야 잘 팔리는가? 우선 보기에 그런 것 같다. 기독교 방송에서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브랜드 설교 경연대회같이 느껴지는 서글픔이 있다. 설교자는 복음 생산자가 아니라 단순한 선포자이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 선포자다. 병원에서 치료행위도 있지만 반드시 영안실이 있다. 비행기를 타도 탈출구와 탈출방법부터 가르친다. 달리는 버스 벽에도 파괴 망치가 비치되어 있으니 만약의 경우 깨고 탈출하라는 경고문이 있다. 그런데 교회에도 탈
약 400년 전인 1592년에 영국에서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목사님은 위의 표어를 들고 침례교회 목사로서 처음으로 선교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그분은 목사님들의 모임 중에서 “여러 목사님들이여, 마태복음 28장에 있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도전했습니다. 그 때 나이든 칼빈주의 목사님께서 “젊은 목사, 앉으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전도를 하고 싶으시다면, 당신과 내가 없이도 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해서 성경을 읽으면서 세계 지도를 연구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우리는 여러 나라에 가서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되리라’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소명을 위해서 외국선교회를 조직했으며 그 선교회에 의해서 그는 인도의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 선교비를 모았으며 또 그의 선교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캐리 선교사는 인도의 칼캇타에서 선교를 시작한지 7년 만에 성경을 번역하여 반포함으로 그해 3,000명의 결신자를 보았습니다. 덴버(Denver) 병원의 보조의사로 일하던 사람이 럭키 산맥의 기슭에서 혼자 낚시를 하다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산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전도사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사람 사는 집에 성경의 좋은 말씀을 가르쳐 주려고 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로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어찌 저렇게 박정하게 말할 수 있을까?” 교회에 나간 지 얼마 안된 어린 나였지만 믿는 사람으로 너무 야박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은 의문(?), 다음엔 놀람(!), 그리고 결론(.)으로 이단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 후 “파수대”라는 책자를 가지고 집집마다 골라 교인 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이단”이니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고 내어 쫓으라고 설교 중에 또 크게 말씀하셨는데 그때가 1951년 8월 3일 처음 교회에 나간지 한 달쯤 지났으니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후였으리라. “이단”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를 이(異) 끝 단(端) 자로 처음은 신앙이 같은데 끝이 다르게 변질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이1:10~11) 저동교회에 같이 나가는 동창생 이진호와 김성화 등과 얘기도 나누
현대의학이 오늘날의 정통 치료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불과 20세기 초였으며 그때까지는 모든 나라에서 대체의학(代替醫學, alternative medicine)이라고 불리는 자연 치료법, 즉 자연의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날과 같이 현대의학이 절대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기초는 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프랑스의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6)가 세균을 발견하여 모든 질병의 원인이 세균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현대의학이 자리 잡게 된 배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파스퇴르의 주장이 아무리 훌륭하고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막강한 세력이나 힘 있는 국가의 지원이 없이는 그러한 논리를 세계 모든 대학과 정부기관은 물론이고 세계 모든 병원에 그토록 신속하게 파고 들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세균이 모든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주장을 폈던 파스퇴르 자신도 주위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게 되자 재고를 하게 되었으며 죽기 전에는 결국 자신의 논리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든 질병의 원인은 세균의 출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질병의 치료에는 반드시 세균의 박멸이
인공지능(人工知能) 즉 AI(Artificial Intellgence)는 표현 그대로 사람이 만든 지능이다. 지금까지 사전에도 AI라는 단어는 없었는데 최근에 갑자기 나타난 기계였기 때문에 사전에 명사가 실릴 시간이 채 없었다. 인공지능이란 기계가 이세돌 바둑기사를 이긴 이후부터 인간은 패배당했다는 자조(自嘲)스러운 한숨도 나왔다. 그런데 사람은 인공지능 기계에 대해 냉정한 태도로 인간의 품격을 지켜야 한다. SDF서울 디지털 포럼 2016년 기조연설에서 스튜어트 러셀 미국 UC버클리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우리가 만드는 인공 지능 시스템은 능력이 많아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만들어 내고 발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목표가 인간이 원치 않는 것일 수 있다.” 러셀 교수는 손에 닿는 모든 게 금으로 바꿔 굶어 죽은 미다스왕의 이야기를 교훈 삶아 인공 지능 기계가 인류에게 긍정적인 도움도 주지만 생각지도 못한 부정적인 해도 될 수 있다고 했으니 말하자면 새로운 무기, 대량 살상 무기 같은 문제다. 가령 가정용 AI로봇이 배고픈 아이에게 고기를 준다고 하여 산 고양이를 식재료로 선택한 사건이다. 로봇이 인간의 가치와 감정을 100% 이해할 수 없기에
25년 전 미국 샌디에이고 부흥성회를 성료하고 애임스(Ames)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디자인 미술을 공부하는 작은 딸의 후견을 살핀 후 아침 일찍 눈길을 헤치고 나와 데모인(Des Moines) 공항에서 미네아 폴리스까지 온통 미국 북부는 눈 덮인 천지로 아름다운 설경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서북항공(NW)19번 보잉 747 비행기는 미네아 폴리스를 떠나 지름길인 알래스카를 경유하여 동경을 향해 날아갔다. 화장실 순서를 기다리던 중 비행기 뒤쪽 비상구 창문을 통해 천하장관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캐나다 록키 산맥의 각양각색의 설산 광경을 승객 몇 사람과 교대로 내려다보며 기상천외의 감탄을 연발했다. 우뚝우뚝 솟은 고산의 빙하와 깎아지른 암벽에 새색시의 치마폭처럼 감싼 설산의 모양은 수억 년을 품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담고 있었고, 크고 작은 산맥과 산맥 사이의 깊은 계곡을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을 하얗게 얼어붙어 장사진을 이루고 주마등처럼 끝없이 나타나고 사라져갔다. 가끔 나타나는 각양 호수는 햇빛에 반사되어 청록옥색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그런데 갑자기 뒤쪽 화장실 사이에서 뚱뚱한 할머니가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헛디뎌 그만 미끄러져 쿵하
이웃 종교로부터 빈 수레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전한 내용이 없으니 어떻게 한다냐? 밤낮 설파해봐야 뻐한 그 말이 그 말이고 그래서 내용이 따분한 종교의 생리, 그냥 있을 수 없으니 뭔가를 내보여야 하기도 하겠고 그래서 전통문화니 뭐니 이름을 붙여서 행사를 하고 있는데, 약수터 약수 이야기, 천사가 내려와서 마시고 비상천했다는 전설이야기, 풀잎 뜯어 녹차 만드는 묘한 차 만들기, 거기다가 어떻게 차를 마서야 하느냐는 다도(茶道) 강습, 전통주 만들기에 이어 전통 된장과 고추장 만든다고 늘어진 항아리의 행렬들. 찬란한 문화유산이라고 건축 색채 그리기, 고전전인 한국 전통적인 춤 이야기, 불교의 여승의 승무(僧舞)는 유명한 춤이요, 그 묘사는 대단한 시(時)였다. 그 한절을 여기에 소개하면 이런 것이렸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파르라니 깍은 머리 / 박사(薄紗)고깔에 감추오고 / 두 볼에 흐르는 빛이 /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조지훈 나는 어린 시절 아스팔트가 아닌 흙과 자갈로 이어진 소위 신작로(新作路) 길 위에 황소가 끄는 수레를 익히 보면서 살았다. 빈 수레는 유난스럽게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그 위에 빈 드럼통
빌리 그래함 목사는 “천사론”을 쓴 후 오랫동안 숙고한 후 발간했다고 한다. 그는 여러 가지 많은 사례를 들어 천사의 존재와 역할을 설명했다. 오늘날 주님과 성령의 인도와 보호 및 천사의 인도와 보호에 대한 혼돈이 있다. 사도행전에는 주님, 성령 및 천사의 인도와 보호는 분명히 문자적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인도의 성자 선다 싱(Sunder Signer)의 전기를 보면 한 번은 히말라야의 티베트고원에서 전도를 하다가 라마승 추장에게 붙잡혀 깊은 구덩이에 던져진 일화가 있다. 물 없는 깊은 웅덩이에 수많은 뼈와 살 썩는 냄새 속에 3일 밤낮 인사불성으로 기도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사명 다할 때까지 나를 지켜 주옵소서!” 사망의 웅덩이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왼쪽 높은 곳에서 자물쇠 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더니 “밧줄을 내리니 그것에 매달리시오!”라고 누군가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밧줄을 잡아 나온 뒤 다시 자물쇠가 채워졌으나 거기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천사의 구조에 감사기도를 드리고 읍내에 나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을 전했다. 관장은 다시 선다 싱을 체포하고 사람들을 불러 열쇠를 훔쳐
어떤 예술가가 전하는 말이 내 가슴에 찡하게 와 닿았다. 그것은 “예술가는 직업이 없다”는 것이었다. 예술을 직업으로 삼는다고 일반인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거리가 아주 먼 고백이었다. 직업이 없다는 그 예술가의 뒷얘기를 들어보니 과연 그들에겐 직업이 없다는 말이 이해되었다. 예술은 예(藝) 자체를 사랑하는 행위다. 예술가는 예술을 팔자고 출산(出産)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무용이든 간에 그 자체들을 사랑해서 이것 끝나고 나면 누가 돈 주겠거니 하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화가 이중섭 화가인들 그렇지 않았겠나. 그가 죽은 뒤, 그의 그림값이 나간 것은 화가와는 별 문제였었다. 순수한 예술정신! 그것을 사랑해서 그것을 하다보니 밥도 옷도 생긴 것이다. 그것이 직업으로 보인 것은 순전히 사람들의 부산물적 착각이다. 적어도 예술가의 철학은 그렇지 않은가 싶어 주제 넘게 내가 정리해 주는지도 모른다. 가령 산 속 숲에서 날아가는 백조가 아름다워 자기를 잊은 채 즐기고 있는 감미자(甘味者)에게 어떤 장난꾸러기가 찾아와서 백조가 날아가는 횟수를 잘 헤아려 보라 하고 그것을 한 번 볼 때마다 돈을 10만원 지불하겠다 했더니 이 감미자는 한
“이 사건 공소사실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되므로, 형사소송법 제 325조 후단에 의하여 피고인들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하고, 형사소송법 제 440조 본문에 의하여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서울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판결서 낭독에 이어서 “이 무죄 사실을 언론에 알리기를 원합니까?”의 질문에 대답은 “예, 40년 전 일이지만 이제라도 알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0분도 안되어 재판은 끝났다. 투옥시켜 재판받을 때와 비하면 정말 아쉬움을 남긴 시간이었다. 40년 전 긴급조치하에서 다 기록할 수 없는 사연은 두 번의 중정압송과 극심한 조사 후 검사의 심문을 거쳐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고 8개월간 2차에 걸쳐 고법에서 결심공판 끝에 부장판사는 집행유예선고 후 최후진술을 물었다. “본인은 문 닫으려는 세 교회를 찾아가 고생하며 목회하느라 이제 와서 생각하니 친족들에게 전도 못한 죄가 통렬하게 느껴집니다!”고 대답했다. “옥중에 갇혔을 때에”(마25:36) 속죄를 위해 친족과 수감자들 200여명에게 최선으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전도에 힘썼다. 세상 재판관 앞에서 최후 진술한 것처럼, 언젠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침례교단 문인들의 문예지 목산문학지에 계인철 동역자가 부탁하기에 아래와 같은 에세이 두 편을 보냈다. 한 편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몇 일 뒤에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집행을 당할 그리스도인 사형수가 살날은 불과 이삼일 밖에 없는지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해 놓고 갈 일이 무엔가 생각했었는데. 도무지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형수 수감 독방에서 무엇을 하겠는가? 봉사하고 싶어도 봉사 받을 자도 없고. 그는 마침내 험하게 쓰던 자기 수감방을 깨끗이 하자고 생각한 뒤 바닥과 벽을 천정을 마르고 닳도록 닦고 문질러 광채가 나는 방으로 만들어 놓은 뒤 전기의자에서 마지막을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한편 에세이의 내용은 또 이런 것이었다. 나의 어머님은 촌노였고 일자 수식하되 귀로만 들은 예수천당 신앙으로 살다가 가셨던 모친인데, 교회마루바닥에 뒹구는 폐지처럼 된 낡은 성경책을 그냥 두고 보기에 민망해서 집으로 가져와서 어떻게 이 성경책을 대우할까 생각 끝에 묘안이 떠올랐지 뭐야?! 어머님은 그리스도 가정인 내 집에도 귀신 쫓아낼 양으로 성격책장을 한 장씩 찢어서 벽에도 붙이고 대문에도 붙였던 것. 왜냐하면 성경에 예수 이
오스본 목사는 미국 오클라호마 주 포카세트 근방 농장에서 태어났다. 13형제 중 7번째 아들로 태어나 농장에서 자라면서 시골학교에 다녔다. 12살 때 형은 몇 일전 그가 먼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나를 데리고 믿음의천막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데리고 갔다. 찬양할 때 피아노를 쳐 달라는 부탁에 기꺼이 승낙했고 복음전도자의 초청시간에 나는 즐겁게 회개했다. 그날 이후 나는 비록 농장에서 일하다가 늦게라도 예배에 참석했지만 어떤 땐 예배에 불참했기에 여러 번 울었다. 영적 갈망 가운데 오래된 대리석 바위에 엎드려 기도할 때 나는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한 없이 울었고 그 때 주님의 복음을 위한 부르심을 느꼈다. 15살 때 부흥사를 따라 천막집회를 도왔다. 이제껏 농장에서 일해 온 것보다 훨씬 넓고 큰 책임과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고향과 부모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두 해 반을 부흥사를 따라 다니다가 드디어 캘리포니아 로스 바노스 집회에서 데이지 아가씨(Daizy)를 만났고 이듬해 18살이 되던 해에 결혼했다. 1944년 봄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드디어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듬해 아들이 태어난 후 교회를 사임하고 인도 선교사로 갔으나 기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