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한해의 절반을 지나면서 그동안 내가 목회하면서 더 중요하게 여겨온 가치들에 대해 정리해봤다. 적고 보니 부족한 점 많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보려고 애는 쓴다. 1. ‘수단’보다는 ‘목적’ 2. ‘현상’보다는 ‘본질’ 3. ‘사실’보다는 ‘태도’ 4. ‘외형’보다는 ‘내면’ 5. ‘속도’보다는 ‘방향’ 6. ‘일’보다는 ‘관계’ 7. ‘결과’보다는 ‘과정’ 8. ‘권한’보다는 ‘책임’ 9. ‘혼자’보다는 ‘함께’ 10. ‘빨리’보다는 ‘멀리’ 11. ‘부분’보다는 ‘전체’ 12. ‘변질’보다는 ‘변화’ 13. ‘주장’보다는 ‘순종’ 14. ‘불평’보다는 ‘감사’ 15. ‘오해’보다는 ‘이해’ 16. ‘비난’보다는 ‘수용’ 17. ‘인물’보다는 ‘인상’ 18. ‘조직’보다는 ‘역동’ 19. ‘성장’보다는 ‘성숙’ 20. ‘양’보다는 ‘질’ 21. ‘겉’보다는 ‘속’ 22. ‘체격’보다는 ‘인격’ 23. ‘문제’보다는 ‘믿음’ 24. ‘화려함’보다는 ‘수려함’ 25. ‘과거’보다는 ‘미래’ 26. ‘처음’보다는 ‘나중’ 27. ‘들은 것’보다는 ‘듣는 것’ 28. ‘나’보다는 ‘남’ 29. ‘재미’보다는 ‘의미’ 30. ‘말’보다는 ‘삶’ 31. ‘
한국교회의 향후 10년은 구약성경의 요셉이 애굽에서 7년 풍년 후 7년 흉년을 경험하는 기간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침체 기간이 30년이 경과하는 시기이다. 한 세대 동안 갈등과 현실 유지에 매달려 오고 있는 한국교회는 80%에 가까운 교회가 작은 교회들이다. 침체가 장기화 될 경우에 닥칠 위험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작은 교회가 무너지고, 교인들은 노령화가 되면서 자립이 어려워지고 다음세대를 준비할 여력이 상실 되게 된다. 앞으로 10년은 한국교회가 위기와 기회가 복잡하게 공존하는 미래에 직면 할 수 있고, 몰락과 부흥의 갈림 길이 될 수 있다. 2010년 통계청의 인구센서스 자료를 기반으로 저출산, 고령화의 파급, 한국교회의 위기 요소들을 고려 할 때에 2050년에는 한국교회 교인 숫자가 500~600만 명으로 감소 할 수 있고, 그 중에 60~70%는 55세 이상 은퇴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21세기는 대형교회들도 많을 것이지만, 작은 교회가 부각돼야 할 시기가 됐다. 전 세계적으로 ‘작고 강한 교회’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이미 전개되고 있다. 작고 강한 교회의 시대이다. 한국교회의 작은 교회가 강하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사역이 활기차고, 교
이머징(emerging)이란 문자적인 뜻은 “새롭다, 떠오른다, 최근, 신흥 등”의 의미이다. 즉 뭔가 구태의연하지 않고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접근을 통해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는 교회의 시각적, 상징적, 예전적 유산을 찾아내어 다시금 그 의미를 되살리는 동시에 그것을 21세기 상황 속에서 재해석하여 적용하고자 노력한다. 즉 이머징 교회는 초대교회의 귀중한 유산을 회복하여 근원적 뿌리를 되찾고자 하는 흐름이다. 머레이(Stuart Murray)는 그의 책 「기독교 시대 이후의 교회」(Church After Christendom)에서 이머징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이머징 교회는 공통점이 너무 없고 예외적인 사항이 많아서 보편화하여 묘사할 수 없다. 대부분의 이머징 교회는 각기 새로워 분명하게 규정짓기에 너무 유동적이다. 그래서 각각의 특징에 따라 독자적으로 불린다. 이머징 교회를 나타내는 호칭에 대하여 일치된 의견이 없다. ‘교회답기 위해 새로움을 찾는 교회,’ ‘떠오르는 교회,’ ‘신선함이 나타나는 교회,’ ‘미래 교회,’ ‘그 다음 교회,’ ‘다가오고 있는 교회’ 등이다.”이머징
이번 주간에는 우리가 오남용(誤濫用)하는 말 중에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모습”은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로서, 옆모습, 웃는 모습, 뒷모습, 산길을 걷는 여인의 모습, 거울 앞에 앉은 누나의 모습, 등으로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은은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주로 매스컴을 통해서 이 말이 엉뚱한 의미로 오남용 되는 사례가 많다. 필자가 메모한 오용사례 몇 가지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사람이 아닌 일과 몬을 [잘못]가리키는 경우다음 예문은 장맛비가 내려서 한강과 인근 지천이 범람했을 때의 현장 취재 리포트 내용이다: “이것은 오목교 모습입니다. 여기는 청대교 북단모습입니다. 물이 없는 모습인데요.… 지금은 물이 차 있는 모습입니다.”이 경우에는, “오목교 모습” 대신 “오목교 전경”, “물이 없는 모습 대신” “물이 빠진 상태” 혹은 “조금 전까지는 물이 없었는데 지금은 물이 찼습니다”하고 말해야 한다.부동산 활성화를 말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거래량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래프를 보고 레이저빔으로 지적하면서 설명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거래량이 늘어나는 현상,” 또는 “추세”라고
2012.10.14. 중앙일보에 실린 글이다.‘財閥(재벌)’이라는 한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 어원을 보면 그렇다. 글자 ‘閥(벌)’은 ‘門’과 정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伐(벌)’의 합성어다. 고대 중국에서는 군대의 장수가 싸움에서 이겨 돌아오면 축하 파티를 열곤 했다. 이때 문(門) 밖 왼쪽에 서 있던 공로 병사를 ‘閥’이라고 했고, 오른쪽 병사를 ‘閱(열)’이라고 했다. 지금도 ‘閥閱(벌열)’이라는 말은 ‘공로가 있는 가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門’ 안에 ‘伐’을 쓴 이유 역시 싸움과 관계가 있다. ‘伐’은 ‘人(사람)’과 ‘戈(창)’이 합쳐진 것으로 ‘칼로 목을 베다’라는 게 원뜻이다. 정벌(征伐), 벌목(伐木) 등으로 쓰임새가 발전했다. 결국 글자 ‘閥’은 ‘싸움에서 칼로 적을 여럿 벤 수훈 병사의 집안’이라는 뜻이다. 글자 ‘財(재)’는 재물을 뜻하는 ‘貝(패)’에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상태를 의미하는 ‘才(재)’가 결합됐다. 말 그대로 ‘돈을 벌고, 쌓아둘 수 있는 것’이 바로 ‘財’다. 이 ‘財’와 ‘閥’이 합쳐져 만들어진 ‘財閥’의 사전적 의미는 ‘돈을 벌어 쌓아둘 수 있는, 여러 분야에서 공이 많은 가족이나 집단’
2. 강소형교회를 만들기 위한 제안한국교회의 위기는 인구 감소, 경제쇠퇴, 사회변화 등과 같은 외부 요인들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됐다. 내부의 문제는 성장의 한계를 스스로 못 넘게 만드는 두려운 것들이다. 본 논문에서 한국교회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강소형교회 만들기 방안들을 위한 시도를 하였다. 일차적으로 문헌 연구를 하였고, 강소형교회들의 사례 조사와 침례교단 68교회의 설문조사를 통하여 강소형교회가 되기 위한 내용을 제시하고자 한다. 건강한 교회의 특징은 8가지로 목사, 평신도, 사역, 조직, 소그룹, 전도, 성경적인 우선순위와 나눔을 가지는 교회이다. 1) 목사(1) 바른 신학과 교리를 가르치고, 은혜의 복음에 대해 확실히 가르치는 교회가 되라(롬 3:20~22), 신학교에서부터 바른 신학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분명히 전해야 영혼이 구원받고 교회가 성장한다.(2)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고, 소명에 끝까지 충실하고 분명한 목회 비전을 제시하는 교회가 되라(잠 29:18). 소명의 사람은 생명을 다해 최선을 다해 목회한다. 믿음의 비전은 미래에 이룰 하나님의 청사진이다. 목사가 준비한 그릇만큼 성장하며 현실적이어야 하고 허황된 꿈을 버려
근래 이르러 교회의 건전성 여부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인가 하는 참으로 난감한 질책이 쏟아지고 있다. 이것은 목회자와 성도들을 향한 따가운 시산이기도 하다. 교회의 이런저런 모습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으면서 던져지는 비판적 질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렇게 된 이유는 사회의 책임도 아니고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교회와 성도 자체의 문제이다.중세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상실하고 있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나 복음을 회복하고 교회의 모습을 되찾는 것 같았으나 또 다른 형태의 목회자 중심주의에 빠져 교회의 본질적 DNA가 되살아나지 않은 채 대선교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교파주의에 매몰된 채 지구촌 곳곳에 교회당이 세워졌다.20세기 초 기독교 목회의 중점사항은 성장이었다.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됐야 하고, 교회가 더 많이 개척되어야 하며, 교회 내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야 하고, 이를 위해 교회당도 더 크게 지어야 하고, 교회의 재정도 늘어야 했다. 소위 말하는 교회성장 운동이 20세기 후반 까지 세차게 몰아쳤다. 그 결과 외형상으로 기독교는 부흥했고, 숫자 면에서 괄목할만한 증대를 이루었다. 그런데 성장은 이루었지
직업적 방송인들에게근래 우리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방송인들은 모두 오른 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볼[포인트] 펜을 끼워들고 나온다. 한참 전에 NBC와 CNN의 몇 앵커들이 펜을 들고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우리나라 방송인들도 모두 펜을 들고 나온다. 펜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으나 필요하다면 테이블 위에 준비해두고 사용한 후에 다시 제자리에 놓는 것이 바른 사용법일 것이다.뉴스나 대담 프로그램을 보면서 전문 출연자들의 손놀림이 너무 많아서 손 유희나 수화(手話)를 보는 것 같이 생각될 때도 있다.우리말에는 형용사와 의성어(擬聲語)가 풍부해서 몸짓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저 높은”이라 할 때 하늘을 가리키거나, “얼굴”을 말 할 때 얼굴 모양을 만들거나,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하면서 오른 팔을 벌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제스처(몸짓)는 의사 전달을 돕기 위해 꼭 필요할 때 잠시 사용하는 것일진대 어떤 출연자는 처음부터 층계를 쌓듯 두 손을 다 사용해버려서 다음 단계를 묘사할 때는 팔을 한껏 들어 올려야 하고 그래도 모자라서 엉거주춤 일어서는 것 까지 본 일이 있다. 제스처는 분명한 의사 전달을 위해 언어 보조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지, 광범위한 시청자를
얼마 전, 경주까지 가서 장례식에 참여하고 돌아온 아내가 피곤할 법도 한데 의외로 표정이 밝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두 가지 얘기를 들려준다. 하나는 머플러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얘기다. 천안아산역에서 KTX기차를 타기 위해 오산역에서 전철을 타고 아산역으로 이동하는데, 도착할 때가 되어 급히 내리려다가 무릎을 덮고 있던 머플러를 그냥 놓고 내린 것. 그러고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KTX로 갈아타고 대전도 훨씬 지나서야 그 생각이 났단다. 그래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전철과 코레일의 분실물센터를 거쳐, 1호선 전철의 종착지 신창역에 전화를 걸었단다. 그랬더니 “그런 건 못 찾는다. 손님이 주의를 했었어야 한다”며 핀잔만 들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람을 보내 찾아보고, 찾으면 전화를 드리겠다”며 아내를 안심시키더니 너무나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안내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내는 그 답변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으리라. 물건 찾는 건 둘째 치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창역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단다. “찾았다”고, “그런데 이걸 어떻게 전해드리면 되느냐“고. 그래서 아내는 자신의 동선을 일러주었단다. “제가 지금 경주로 가는데 오늘 저녁에
Ⅴ. 강소형교회 만들기작은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 전제 조건들이 있다. 목사가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기 원해야 하고, 교인들도 교회성장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기 원하고, 교회는 전도의 목표가 제자 삼는 것임을 동의하고, 교회가 심각한 임종적 질병을 가지 않아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빨리 성장하는 교회들 중에 중요한 성장요인들의 하나는 지도자인 목사의 믿음이다. 교회 지도자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통하여 행하기 원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고 그 비전을 교회에 효과적으로 사용할 때, 그의 믿음은 교회 성장을 일으킨다. 믿음의 은사는 성령의 능력을 행하는 은사이며 하나님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고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그 임무를 수행시키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다.교회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작은 교회 성장에서 교회의 건강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머리와 손과 마음의 건강이다. 그 결과는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자신의 특성을 개발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성장은 질적 성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질적 성장은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손과 발 그리고
21세기 교회는 치유목회를 펼쳐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해나갈 책임이 있는 바,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신 예수님의 삼대 사역을 중요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대략적으로 볼 때 진리를 가르치는 사역은 종교개혁을 통해 복음진리가 회복됨으로 상당부분 이루어졌고, 전파하는 사역은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현대선교 운동이 펼쳐지면서 많은 진척이 있었다.그러나 고치는 치유사역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다가 20세기 이르러 심리학의 발전과 목회상담 분야가 열리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치유사역은 편향적인 모습으로 인하여 많은 오해와 편견을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목회상담을 비롯한 교회 내에서의 치유목회에 대한 강조가 점점 커져가고 있다.미국 서던신학교에서 목회상담을 공부한 안태길 박사는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치유사역이 강조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인 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을 받아온 결과 피해의식 등이 집단무의식화 되어 있고, 문화적으로 샤머니즘, 불교, 유교 등이 혼합된 종교의식이 저변에 깔려있으며, 급진적인 근대화로 인하여 환경적으로 빚어진 가정문제와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들이 깊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
누가는 부활현현 사건에서 제시된 예수의 말씀들의 많은 부분을 사도행전의 시작 부분에서 사도들에게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의 마지막 말씀들로 다시 제시했다. 사도행전 1:4~8에는 누가복음 24:44~49에 나오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들이 상당 부분 반복된다. 특히 누가복음 24:47~49에서 사도행전의 역사가 예고되고 사도행전 1:4~8에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들이 반복된 것은 누가복음에서 사도행전으로 옮겨가는 서사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또 다른 특징은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마지막 말씀들과 사도행전 1장에서 그것의 상응하는 부분 둘 다 예수의 승천 사건으로 맺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두 부분에는 약간의 조화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의 승천은 40일 동안의 부활현현 사건들 후에 이루어진 반면(행 1:3), 누가복음에서는 부활절 당일 저녁에 일어난 것으로 제시된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부활현현 사건들이 부활절 당일에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된 것은(눅 24:13, 36, 44, 50) 사건들의 극적인 강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다른 관심사들로 인하여 누가복음과의 차이점을 남겨놓았다.누가는 부활현현 사건의 마지막
퇴임을 앞두고 가지고 있던 승용차를 한 직원에게 넘겨주고 새 차를 샀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승용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주말과 야간에 가까운 곳에 출입할 때 일일이 기사에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새 차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토요일 오후에, 옛집에 다녀오면서 어떤 육교를 올라가는데 뒤쪽에서 『쾅』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차가 몹시 흔들렸다. 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등절 했는데 마침 1차선을 가던 대형 트럭이 육교 위에 멈춰 서 있다가 내가 가까이 가니 한 백여 미터 쯤 앞 갓길에 정차하고 있는 하얀 승용차를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상황판단이 되었다. 그 차가 차선을 바꾸면서 내 차의 바퀴 부근을 친 것이었다.나는 다행히 운전대를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했다. 내가 가해 승용차 뒤에 차를 세우자 한 4, 50십 세 쯤 되 보이는 여성 운전자가 내게로 오더니, “다치지는 않으셨는지요? 제 잘못이예요. 제가 변상 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나는 그 때까지, 잘 잘못 간에 접촉사고가 났을 때 먼저 사과하는 운전자를 나는 본 일이 없었다. 내 승용차는 뒷문에 흠이 좀 생기기는 했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조심 하셔야지요. 난 괜찮으니 어서 가세요”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늘 새로울 것도 없이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뻔한 일상들. 과연 그 일상들은 얼마나 위대할까? 오늘 아침도 역시 스스로 일어나기는커녕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5분만 더”를 외치며 여전히 이불쟁탈을 벌이는 엄마와 딸의 일상. “오늘도 늦었다”면서도 머리는 꼭 감아야 하고 고데기는 꼭 대야하는 사춘기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일상. 둘러앉아 아침밥 먹는 일은 꿈도 못 꾸고 토스트 하나조차도 겨우 한입만 베어 먹은 채 “다녀오겠습니다”라고만 외치며 뒤도 안돌아보고 뛰쳐나가는 딸의 일상. 과연 등교차라도 잘 탔는지 걱정되어 베란다로 내다보며 한 번 더 “잘 다녀와” 인사를 건네는 엄마를 그제야 보고는 “어, 엄마”라며 살인미소 한방과 손 한 번 흔드는 것으로 미안함을 때우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아침의 분주함을 일단락 짓는 엄마의 일상. 이렇게 아침마다 반복되는 이 일상들은 과연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할까? 역시 오늘 밤에도 학원 두 개를 들러 집으로 돌아온 아들,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조차 힘없어 보여 등에 맨 가방 받아주는 것으로 하루의 고단함을 덜어보려는 엄마와 아들의 일상. 그래도 엄마 마음엔 얼른 씻고 방에 들어가 조금만 더 공부했
고린도후서3:3에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하는 말씀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 하나님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곳은 안디옥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추천서나 증명서가 없어도, 이름표를 달고 다니지 않아도 선한 행실을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쟁이’임을 알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러한 표현은 언행일치, 심행일치하는 참다운 기독교인들이 되어야만이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거룩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불륜과 간통을 숨기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이자 충신인 우리아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위계에 의한 살인 및 살인교사’의 방법으로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음흉한 편지를 장군 요압에게 보냈다. 살인편지의 노래는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