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인 오미크론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인천의 모교회에 확진자가 발생했다. 문제는 방역당국의 동선 파악에 비협조적으로 대하며 늦장 대응을 초래하며 교회가 또다시 ‘교회발 확진’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지난해 2월초 이단사이비 종교시설의 코로나 확산으로 전국이 종교시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가운데 이번 인천 모교회의 코로나 발생은 또 다시 교회가 집단감염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동안 교회가 쌓아온 철저한 방역체계와 나누고 섬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이번 사태로 공든 탑이 무너진 꼴이 됐다. 지난 11월 초부터 단계적 일상회복의 일환으로 정부의 코로나 방역지침이 변경된 이후, 교회는 모처럼 대면예배의 은혜를 나눴다. 정부의 지침에 따라 아직은 제한적이지만 다양한 지침으로 방역지침의 문턱을 낮춰준 것은 환영할 일이다. 여전히 정부의 지침에 한계가 있고 교회에 대한 인식 또한 여전히 불안한 가운데 놓여 있지만 교회가 이렇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예배에 대한 사모함과 신앙활동에 대한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일상회복 이후 급격한 코로나19 확진자 증가는 12월 초
‘함께’와 ‘공동체’라는 단어는 우리 한민족에게 있어 불가분의 관계이다. ‘두레’나 ‘품앗이’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고 3·1운동, 국채보상운동, 가장 현대에 들어서는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과 태안기름유출 사건 때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함께해 빠르게 사고 지역을 회복시켰던 일 등 많은 사례들이 있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공동체에 대한 친밀감이 교회가 성장할 수있었던 밑거름 중 하나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한다. 교회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며 한 형제임을 중시하면서 함께하는 문화가 깊게 자리했다. 아쉬운 점은 그러한 공동체가 개교회 내에서만 작용한다는 비판들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타 교단에 비해 개교회주의를 더욱 강조하는 우리 교단의 경우 이러한 비판이 자주 도마 위에 오른다. 한국침신대 남병두 교수는 자신의 저서 “침례교회 특성 되돌 아보기”를 통해 침례교회의 특성인 개교회주의에 대해 “바깥에서 개교회 이기주의로 보여지는 때가 종종 있다”고 지적한다. 침례교회는 교회 간의 연합을 잘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 교수는 침례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며 오해임을 강조한다. 그 증거로 초기 침례
코로나19 사태로 앞당겨진 4차 산업 시대 목회는 대면 중심의 현장 예배를 지향하던 한국교 회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초연결사회, 접속 패러다임의 전환점에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예배당의 빈자리에 성도를 채우는 것이 부흥이라고 배워온 목회자들로서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텅 빈예배당에서 새로운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는 이미 익숙해진 “가상공간 혹은 사적인 공간의 공적 공간화”이다. 다시 말해 예배와 신앙교육의 공간이 교회당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니 급진적으로 가상의 공간 속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몇 해 전까지 누가 주일 예배를 자기 집 거실에서 스마트폰으로 드리는 성도들의 믿음이 선하다고 말할 때가 올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이미 세상은 코로나로 앞당겨진 4차 산업 시대의 변화에 직면하여, 누구나 손쉽게 스마트폰 안에 디지털 공간과 접속해 가장 사적인 공간인 가정에서 예배가 가능한 초연결사회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에 코로나19 사태는 4차 산업 시대의 변화를 실험하는 도전과 모험의 시간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감염병 전문가뿐 아니라 사회의 패러다임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제111차 총회(총회장 고명진 목사) 회기의 중점사역은 100만 뱁티스트 전도운동이다. 교회는 영혼구원과 선행을 실천하는 곳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던 제자들과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쁨으로 떡을 떼며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며 예배한 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델이다. 로마제국의 핍박 속에서 초대교회는 말씀 선포와 이웃전도를 실천했으며 병든 자와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보살폈다. 침례교회도 오지 산간 지역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고 이를 거점 으로 이웃을 돌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을 열어줬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교회가 보살피지 못한 지역은 침례교 사역자들이 자비량으로 달려가 복음을 전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우리는 영혼 구원에 대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강력한 방역지침으로 성도들도 모이지 못했고 믿지 않는 이웃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교회로 이끌고 왔지만 제대로 정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교회의 전도사역도, 양육 사역도, 코로나 이전처럼 활발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코로나로 인해 교회는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교회의 돌봄으로
코로나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우리에게 와서 우리로 변화를 요구했다. 너무나 안일했던 초기 대응과 나와는 상관없을 줄 알았던 어리석음이 화를 키웠다고도 말한다. 또한 교회도 변화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믿는 자라면 코로나를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일명 지혜롭게 하라는 말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어느 시대이든 교회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라면 믿음뿐이다. 언제든 조건은 계속해서 변화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끊임없이 사람이 우선이라는 말이 정의처럼 주장하고 동조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우린 단순한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신정 민주주의자이다. 조건과 상황에 적응하여 변화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비대면 신앙은 없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전투다. 싸우는 것이다. 져도 괜챦은 싸움이 아니라 목숨을 건 싸움이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소개하는 글을 부탁받았다. 그러나 결론 부터 말하면 특별히 코로나 이전의 교회생활과 많이 다르지 않다. 주일이면 예배드리고, 주중엔 수요예배, 구역 예배, 금요예배로, 매일
추수감사주일이 돌아왔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추수감사주일이다. 아직은 낙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감사한 것은 정부의 ‘단계적 일상회복’ 방침에 따라 대면예배 제한의 빗장이 풀려 예배회복의 전환기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도 2000명대를 훌쩍 뛰어넘는 코로나 확진자 숫자가 가슴을 졸이게 만들지만 백신 접종 인구 비율이 70%를 넘어가고 있기에 다소 희망의 모습을 소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난해 신천지 집단 확진자 사태를 시작으로 한국교회는 참 많은 고난이 있었다. 처음 대규모 확진자의 직격탄을 맞았던 대구· 경북지역을 비롯해 많은 교회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교회들이 십시일반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 아름다운 은혜의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6월 15일 온누리교회에서 열린 ‘코로나19 이후의 한국교회 대토론회’에서 발표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로 교회 헌금에 변화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전체 목회자 중 68.8%가 ‘헌금이 줄었다’고 답했다. 감소 비율은 20~40% 미만이 53%로 가장 많았다. 또한 올해 초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4/4분기 가계동향조사’에
코로나19는 팬데믹이다. 11월 7일 현재 240개 국가에서 확진자 수 약 2억 5000만명, 사망자 수약 530만명으로 전 세계 인구 79억명 중 3.2%가 코로나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역사는 전염병과 인간의 목숨을 건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처음 인간은 미생물로 인해 발생하는 전염병을 대책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두창과 말라리아는 고대 로마를 멸망시켰으며 장티푸스와 세균성 이질, 괴혈병은 십자군 원정을 실패로 돌아가도록 했다.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은 페스트는 중세를 몰락시켰고, 두창은 이후 아즈텍과 잉카 문명을 사라지게 했다. 전쟁광 나폴레옹을 무너뜨린 것은 발진티푸스였으며, 오늘날의 미국 영토를 완성 시킨 것도 황열이었다. 20세기 초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 대전 사망자의 세배가 넘는 5000만명의 목숨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대책 없이 전염병에게 당하고만 있던 인간도 반격하기 시작했다. 백신과 항생제를 발견했고 두창과 페스트를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 더불어 위생의 중요성도 부각되어 도시 계획, 공공보건 정책, 법적 환경 개선 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손씻기의 생활화와 식생활의 개선 그리고 일회용 주
우리 교단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협동선교 프로그램(CP)을 위한 후원 헌금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 110차 회기에서 논의해 교단을 대표하는 교회들이 나선 CP는 다양한 사역들을 지원하며 교단이 필요한 사역에 적재적소에 사용되고 지원이 이뤄졌다. 교단 소속 선교사와 미자립개척교회, 원로목사, 다음세대 사역을 위해 CP는 현 우리교단이 당면한 문제에 도움을 주고 헌신하기 위한 사역에 초점을 맞췄다. 올해에도 CP에 동참하는 교회들은 이 나라와 민족, 세계선교와 교회, 성도들을 위해 CP가 건강하게 쓰여지고 활용되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CP의 재원은 개교회의 적극적인 헌신과 섬김으로 이뤄져야 한다. 우리 교단은 자발적인 총회비(협동비)를 납부하며 교단 사역을 돕고 있다. 개교회가 정한 금액만큼 교단에 후원하고 있으며 이는 강제성을 띠지 않는 것이 우리 교단의 특징이자 우리 교단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회원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CP는 엄연히 총회비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CP사역을 목적으로 100% 활용되고 사용되는 긴급기금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미남침례교단도 절기에 따라 다양한 CP헌금을 모금하고 이를 기관 사역이나 교단
코로나 팬데믹을 넘어 일상회복의 길을 걷고 있는 상황에서 각 기관들은 총회와 협력을 위한 발전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이와 관련된 다양한 사역과 목회 프로그램이 요구하고 나섰다. 우리교단은 개교회를 중심으로 협동 및 협력사역을 추구하는 교단이다. 그렇기에 개교회는 교회들이 모여 지방회를 구성하고 침례교 총회와 기관은 침례교 정체성을 기반으로 영혼구령과 세계선교, 선행을 실천하는데 헌신하고 있다. 총회는 침례교회를 대표하는 임의단체로 교단의 미래와 비전을 세우고 총회 산하 12개 기관과 함께 성령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이를 위해 총회는 매년 회기가 시작되면 교단 산하 기관을 순방하고 기관의 현황과 기관의 사업 들을 살펴보고 이를 총회 사업과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를 가진다. 지난 10월 28일 12개 기관이 총회에 모여 각 기관에 대한 보고와 함께 건의사항을 전달했다. 모든 기관이 공히 기관이 존재 목적과 사업 방향에 맞춰 침례교회와 협력하는 기관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와 함께 총회와의 협력과 협조사항은 대부분 재정적 지원에 대한 이야기로 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총회가 기관의 사업을 살펴보는 이유는 기관이 세워진 주
이번 제111차 회기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바로 총회 기관 대표들의 교체이다. 본사를 비롯해 교회진흥원, 군경선교회에 새로운 인물들이 나섰다. 지난 회기 기관의 구조조정과 기관장 임기 만료를 앞두고 이뤄진 일들은 임시총회의 결의 사항에 따라 진행된 일로 새로운 회기에 맞춰 새로운 시작의 길을 걷게 됐다. 각 기관은 기관에 맞는 본연의 사명과 목적, 비전에 맞게 사업을 주도하고 총회와 지방회, 개교회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특수 목적의 사역에 역량을 갖춘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군경선교회는 군과 경찰 선교를 감당하며 군선교 사역자들을 양성하고 관리하며 군과 경찰 복음화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총회 기관은 총회와 달리 기관의 각 목적 사역에 맞춰진 단체이다. 신학교육을 위한 신학교,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의 교육과 교육콘텐츠 개발, 문서선교, 출판을 담당하는 교회진흥원, 해외선교사역을 감당하는 해외선교회, 국내미자립교회와 개척교회 부흥과 성장을 돕는 국내선교회 등 모든 기관이 기관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총회 사업을 돕고 지방회와 개교회의 성장을 위해 세워진 곳이다. 그렇기에 새롭게 세워진 기관장은 기관 본연의 사명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