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위기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위기가 다가 왔음을 직감하고 있다. 현실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에는 대형 교단 신학대학에서 뿐만 아니라 중소교단 신학교와 몇 교회 있지도 않는데 교단을 창설한 군소교단 신학교가 무자격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이렇게 과잉생산하다보니, 신학교를 졸업해도 갈 곳이 없고, 교회를 개척하자니 여러 가지로 조건이 맞지 않아 사역할 자리가 없다. 또한 낮엔 교회, 밤엔 대리운전을 이른바, “투잡”을 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 10시에 식당으로 출근해 근무 오후 10시까지 12시간 일을 한다. 예배가 있는 수요일은 오후 8시 퇴근해 예배를 인도하고, 금요일 예배는 목사부인이 인도한다고 한다. 주일은 온전히 교회 예배와 사역을 한다. 그리고 어떤 목회자는 밤엔 대리운전 기사, 편의점 아르바이트, 새벽엔 물류회사 하역, 우유, 녹즙 배달원 그리고 낮엔 목회자(목사),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이 같은 현실은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성돈 교수가 목회자 9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밝혀졌다.조 교수는 이메일과 페이스 북, 그리고 전화설문을 통해, 모두 904명의
오늘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의 리더십을 보면 둘로 나눌 수가 있다. 지배자형과 지도자형이다. 지배자형 리더십은 남을 이기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사람이다. 정복자의 모습인 것이다. 일평생 남을 이기는 것이 성공인 줄 알고 살아간다.그러나 지도자형 리더십은 다르다. 싸움이 남과의 싸움이 아니고, 자기와의 싸움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도자는 자기와의 싸움에 모든 힘을 쏟는다. 남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를 끊임없이 탐문하면서 바로 서기 위해서 몸부림을 친다. 때로 우리는 용기가 없어서 잘못된 일을 보고도 눈을 감는다. 귀찮아서 잘못된 일을 보고도 눈을 감고 못 본채 한다. 잘못된 일을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난이나 비판이 아닌 정직이고 의를 세우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피해간다. 더군다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이라면 당연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때로 우리 사회에 “너나 잘 하세요” 라는 아주 냉소적인 분위기가 있다. 교회의 지도자라면 진실한 마음으로, 정직한 마음으로, 사리사욕을 버린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선 자세로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나
제104차 정기총회가 곧 다가오고 있다. 제103차 총회 의장단과 임원들에게 우선 침례교회를 이끌면서 여러 고초를 겪고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며 침례교회를 위해 노력한 점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잘하고 칭찬받는 일보다 잘못한 일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기억난다고 하지만 지난 제103차 총회도 나름 열심을 다해 섬기고 헌신해 온 것은 인정한다.물론 지난 총회 회기를 돌아볼 때, 우리는 과연 침례교회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스스로 물을 때가 되지 않나 싶다. 최근 몇 년간의 끊임없는 송사와 논쟁으로 허비한 시간은 우리에게 성장과 성숙의 동력을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교단의 성장은 정체되고 미 자립교회는 점점 쇠락의 길을 걸으며 교회 문을 닫고 교회 지도자의 교체로 인한 갈등으로 법정 분쟁까지 벌어지며 세월호 대참사로 주목받은 구원파가 우리 교단과 흡사한 단체명을 사용하고 있어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기도 했으며 은퇴 목회자가 은퇴 이후 어떠한 대비도 하지 못해 방황하고 어려움을 겪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분을 놓치며 자랑스러운 침례교인의 이름을 내세우기 부끄러운 상황이 작금의 우리 상황이다. 지금 침례교회는 무엇보다 준비된 지도자와 지도력, 리더십의 부재를 겪고
한가위라고 불리는 추석은 신라시대에서 유래된 우리나라 최대의 고유 명절이다. 그런데 추석이 유교 문화와 결합되면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로 자리 잡게 됐다. 그래서 제사는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곤혹스러운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추석이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로 성도와 불신자가 함께 쇠는 날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정신에 의거하여 추석을 즐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추석은 민족 최대 명절로 전해져 오지만 사실상 전혀 상반된 슬픈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다. 백제 고구려 삼국시대 말기 삼국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신라가 당나라의 100만 대군을 끌어들여 9년간의 전쟁 끝에 마침내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케 하여 그 승리를 기념하게 한 서기 668년 9월 10일 7백년 고구려 역사가 마감하는 날이기도 하다. 신라입장에서는 당시 승전기념일이지만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의 입장에서는 나라가 망하고 망국의 백성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날 이였기에 슬픈 역사가 깃든 날이 추석이기도 하다.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달은 피조물이고 또한 달이 빛을 내는 것이 아니고 태양에 반사되어 비치는 것이기 때문에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기에 창조주를 믿는 신앙인으로서는
지난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적인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된 지 69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교회가 해마다 광복절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한국교회의 역사적 정통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많이 받았는데 그 비참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광복절은 1945년 8월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 패하여 항복하게 되고 이에 한반도가 일제의 강점기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광복은 문자 그대로는 “빛을 되찾음”을 의미하고 국권을 되찾았다는 뜻으로 쓰인다. 또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은 194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되어, 그해 11월말에 미국, 영국, 중화민국 3국은 소위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항복했고, 8월 8일에는 미국과 영국, 소비에트 연방이 모여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은 드디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한민족은 카이로 선언과 그것이 다시 확인된 포츠담 선언에 의해서, 그리고 한민족의 오랜 투쟁
국가의 안정보다 이석기의 안전이 더 중요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면서 국가전복을 기도한 대표적인 북한추종 위험세력들에 대한 선처탄원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천주교 엄수정 추기경과,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남궁성 원불교 교정원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 김영주 총무 등 이들은 평소 진보성향을 보인 사람들로 이석기 선처 탄원서 제출이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내란음모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석기 일당은 국가를 위험에 빠뜨릴 위험한 사람이다.그들의 최종목표는 인민민주주의 정권(공산정권)수립이다. 이들은 걸핏하면 남한공격을 호언하고 있는 북한정권을 위해 남한의 전기 통신을 비롯한 기간시설을 파괴하는 등 물질적 기술적 지원방안과 유격투쟁 및 테러를 모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오랫동안 지하 비밀공작을 해오던 이 세력들은 이제 금배지를 차고 국회까지 진출해 북한의 호전정권을 고무시키고 있다. 국회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군사, 행정, 산업, 기술, 정보가 모이는 곳이다. 대한민국의 언론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방패로 삼아 종북 정치 및 파괴음모 활동을 해왔고 지난 총선 때는 선거연대를 통해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
한동안 잠잠하던 차별금지법이 요즘 다시 공론화되고 있어 한국교회와 개교회들이 긴장하고 있다. 일부 정치권에서 발의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종교차별금지법 재시도 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된 민주주의 국가다. 종교의 자유라 함은 자신의 종교에 대해 외부의 강제를 받지 않을 자유와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외부에 표명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최근 일가에서 “종교 평화 법 및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선 가운데 개신교계가 강하게 반발하며 맞서 논란이 재연될 조짐이다. 특히 불교 시민단체들이 관련기관, 단체를 상대로 이 법의 제정 촉구와 관련한 연대운동에 돌입해 주목을 끌고 있다. “종교평화 법 및 차별금지법”은 종교나, 성적 소수자, 소수 인종, 경제적 약자에 대한 억압, 차별을 금지하고 종교 간 갈등을 해소하자는 차원에서 제정이 추진되고 있으며,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 국가들에서 종교, 인종, 민족 등에 관한 편견과 증오를 범죄로 규정해 처벌하는 “차별금지법” 이나 “증오방지법”과 같은 맥락의 법적 장치로 평가된다. 2012년 불교 조계종을 중심으로 제정을 추진해 당시 몇몇 민주당 의원들이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하기
1871년부터 1900년까지 이 시기에 유럽 사회가 심각하게 직면한 문제는 기독교 역사 전통이 유럽의 주류 문화에서 소외되면서 생기는 문제들이었다.즉 과학, 세속화, 공업화, 자유주의, 민족주의 국가,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 기독교의 정신이 유럽 사회에 소수의 지식인들에게서 노골적으로 거부되기 시작했고, 대다수의 대중에게는 단지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기독교 관습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 발생하게 됐다는 것이다.19세기에 제일 먼저 기독교로부터 이탈한 자들을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지식 계층으로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대학교수들과 직업적 문인이고, 둘째는 의학, 법학, 저널리즘, 그리고 교육 분야에 전문가들과 도시 판매상과 상점의 주인과 같은 소부르주아들이며, 셋째는 농토에서 공장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대대적인 인구이동을 통해서 정통적인 생활 근거지를 떠나면서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관습에서 벗어났던 일부의 도시 노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로부터 이탈한 이들은 마르크스 사회주의로, 실증주의자로서 휴머니스트로서, 또는 종교의 역할을 하는 국가주의자(민족주의자)로서, 일부는 막연한 범신론에서 나머지는 단순한 불가지론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너무나 무책임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지독한 이기주의와 독선에 매몰되어 있다. 도시교회들은 대형교회로 발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현실 유지에 급급해 농촌교회나 이웃교회를 돌볼 여유가 전혀 없다. 농촌교회들의 빈약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한국의 농촌교회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누구도 명확하게 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국민과 목회자들이 농민들, 즉 ‘땅의 사람’들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다 외국의 농축산물 수입개방과 정부의 농업홀대 정책, 그리고 WTO의 쌀 시장 전면개방으로 인해 농업농민들은 설자리를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됐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농촌교회는 벼랑으로 내몰려 해체위기에 직면해 있다. 무엇보다도 외국농축산물 수입개방은 우리민족의 식량 지급률을 크게 떨어뜨리고, 나아가 농민들의 농업에 대한 의욕을 사실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무상제공과 외국의 농축산물이 마구 몰려오면서 우리의 입맛은 서구사람의 입맛으로 변질되어 버렸으며, 우리농산물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농업은 바로 우리국민의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농
한국교회가 영적인 성장도 침체 되어 있지만 질적인 면과 수적 성장에도 크게 둔화되고 있어 유럽의 교회들처럼 교회 건물만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고 있다. 북 유럽에서는 교회가 교회로써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 됐다. 독일에서 태어난 루터교회가 덴마크를 비롯해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 여러 나라에서 국교로 인정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본인이 믿지 않아도 기독교인 된다. 이러다 보니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곳이 아니라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됐고 목사는 교회에서 예배인도나 설교를 할 수 없게 됐다. 왜냐하면 교회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물만 크게 남아 있을 뿐이고 교회 자체는 죽어 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 교회를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은 성경적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해야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러한 유럽 교회 모습을 답습해가고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행정뿐만 아니라 조직과 제도는 빈틈없이 일사불란하게 교회를 움직여 간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인 복음 전파와 성도들의 영적 질적 성장을 위해 교회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고 있는 지 의심하지 않을 수
세월호 사태로 인해 주목받고 있는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 씨가 한국 주요 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한 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의 실세임이 알려지면서 교단이 구원파로 오인 받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본 교단명인 ‘기독교한국침례회’와 유사한 명칭으로 알려지면서 일부교회에서는 정통 침례교회가 “구원파다” “이단 사이비 단체다” “유 씨 부자나 측근들이 은신해 있다”는 등 심각한 유언비어와 함께 교회의 적잖은 피해를 입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구원파 산하 교회로 오인해 측근이 숨어 있다고 제보를 받고 교회에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있었으며 더 큰 피해는 교회 전도사역과 영혼 구령 활동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방전도를 나가거나 교회 전도지를 나눠주면 “너희 구원파 아니냐?” “침례회라는데 같은 곳이다.” “유병언의 비호단체다” “침례교회는 이단이다”라며 강한 거부감과 경계심을 나타내며 침례교회를 피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교회에 등록한 새 신자들도 “침례”라는 말을 들으면 ‘구원파’와 연결을 짓고 담임 목회자와 상담을 받기도 하고 문의도 하거나 결국 침례교회라는 이유만으로 교회를 떠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교회 스스로가 자정능력
지금 한국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교회뿐만 아니라, 사찰 등 대형 종교시설의 경매 건수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다. 호황기에 무리하게 대출금을 받아 건물을 신축, 증축했다가 불황기에 접어들면서 재정난에 빠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부동산정보업체에 따르면 올 1월부터 4월까지 경매 물건으로 나온 대형 교회 및 사찰 등 종교 시설은 137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95건)보다 45% 증가했다고 한다. 연간 기준으로도 종교시설 경매 건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08년 연간 181건에 불과하던 종교시설 경매건수는 2012년까지 계속 증가했으며 지난해에는 391건까지 껑충 뛰었다. 이와 같이 경매물건수가 증가하는 이유는 교회가 은행 빚을 지면서까지 대형교회 건축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결국 파산하거나 파산 위기에 몰려서다. 경기불황을 겪으면서 성도의 수가 감소하고 성도들이 내는 헌금이 줄어들자, 교회가 원리금을 제때 갚지 못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몇 일 전 100억 원 이상의 초대형 교회가 잇달아 법원 경매시장에 나오고 있다고 인터넷에 기사가 실렸었다. 12일 대법원에 따르면 경기신도시 백현동에 자리 잡은 충성교회를 비롯해서 서울종로구
불신자들이나 성도들 중에서도 교회가 예배만 드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를 향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칭하셨다. 이와 같이 교회의 별칭을 통해서도 우리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꾼과 사역으로서 할 일이 참으로 많은 단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요 살아 역사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선포하듯 교회의 일차적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충만하게 전하는 것이다. 불안전한 세상은 오직 복음으로라야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상과제가 전도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처럼 교회가 위임받은 1차 과업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우리의 교회는 어떠한 활동에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데, 지금 한국교회는 영적으로 바람난 교회가 되고 말았다. 교회를 대표하는 총회도 교단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대표라고 자처하는 연합단체들이 교회의 본질적인 복음전도 사역보다 개인 명예에 치우쳐 사분오열로 찢기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21세기의 교회가 당면한 큰 문제는 종교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종교 다원과 포스트 모던니즘의 영향은 점점 더 단 하나의 객관적 진리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의 복음을 과연 유효하게 선언하고 선포된 복음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그들의 삶과 생활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혹은 교회 중심적 배타주의를 고수하며 신앙을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종교 다원주의란 종교 다원 현상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다원적인 종교들을 동일한 지평선에서 바라보며 다원적 종교들의 궁극적인 것의 실제를 주장하는 종교적, 신학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종교로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데 문제가 있다. 따라서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의 진리가 있고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는 그 여러 종교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잘만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행복한 곳을 찾으라면 분명 가정을 꼽을 것이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문제가 생겨도, 슬픔이 있어도 그 모든 것을 치유하고 풀어줄 수 있는 곳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가정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가정에서 불행이 싹트는 경우가 많다.5월 달 마지막을 보내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깊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보면 가정생활에 대한 지혜가 담겨져 있다. 특히 시편에서 보면 ‘너, 라고 일컬어지는 대상은 남자로 보인다. 또 ’네 집 안방에 있는 아내,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 네 자식의 자식이 다 등장한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가정은 주님을 경외하며, 화목하게 살고 있는 가정으로 우리가 모델로 삼을 만한 모범적인 가정이다. 이 시대의 가정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식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이 없어지고,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다. 요즈음엔 “역기능적 가정”이 너무 많아졌다. 가정은 깨어지고, 나누어지고, 미워하고 질시하는 곳으로 변했다. 이처럼 역기능적 가정이 늘어가는 이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